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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팔라우, 바다가 만든 나라

by 돌야dolya100 2024. 10. 10.

34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바다가 만든 나라, 팔라우의 정식 국가 명칭은 팔라

팔라우 지도

우 공화국(Republic of Palau)이며 간단히 팔라우라고 한다. 팔라우는 팔라우어(미크로네시아어)의 벨라우(Belau)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선택된 곳, 아름다운 곳이란 뜻이다. 이 이름은 팔라우가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며 선택된 곳이란 것을 반영한 이름이다. 팔라우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팔라우어(Palauan)이다. 팔라우어는 미크로네시아어이며 미크로네시아어는 오스트로네시아 언어에서 온 것으로서 폴리네시아어, 멜라네시아어와 함께 태평양 섬들에서 사용되는 주요 언어 군이다. 팔라우어는 미크로네시아어에 속하며 현재도 지역 사회에서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영어는 정부, 행정, 교육, 비즈니스 등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며 이외에도 일본어와 필리핀어도 일부 지역에서는 사용된다.

1. 팔라우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팔라우의 영토와 수도

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에 위치한 팔라우의 면적은 331 제곱킬로미터이며 34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국가로서, 이 군도는 모두 8개의 군도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섬으로는, 코로르(Koror), 앙가우르(Angaur), 바벨다오브(Babeldaob), 페르러(Peleliu) 등이 있으며 이중 가장 큰 섬은 바벨다오브 섬이다. 수도는 바벨다오 섬에 위치한 넹어르(Ngerulmud)이며 이곳은 정부와 행정의 중심지로서 면적이 8.1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약 400명 정도 거주한다. 바벨다오 섬에는 높이 242m의 로크산(Rock Island)이 있으며, 여러 다른 섬들에도 구릉지대와 작은 산들이 분포해 있다.

- 팔라우의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팔라우 인구는 총 17,600명이며 인구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고 주요 섬인 코로르(Koror)와 바벨다오브(Babeldaob) 섬에 집중되어 있다. 바벨다오 섬에는 약 6천명, 코로르 지역에는 11,200정도 거주하는데 이것은 팔라우 전체의 65%를 차지한다. 코로르 섬의 면적은 21.6 제곱킬로미터이며 땅에 비하여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서 경제와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팔라우의 인종 비율은 팔라우 원주민이 70%, 미크로네시아인이 20%, 필리핀, 일본, 중국, 미국 등 이주민이 10%를 차지한다.

 

2. 팔라우의 역사, 정치, 경제

, 교육

- 팔라우의 역사

팔라우의 역사는 고대역사, 유럽 탐험기, 일본의 통치기, 미국의 신탁통치, 독립과 현대로 나누어진다. 

고대 나라차마용 왕국

팔라우의 고대 역사는 다른 태평양의 섬들과 마찬가지로 약 3000년에서 1000년 사이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인, 멜라네시아(뉴기니) 지역과 필리핀 등에서 바다를 통하여 이주한 민족들이 팔라우에 정착함으로 시작되었다. 이들 원주민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부족 중심의 독립적 사회와 정치 체제를 형성하였으며 족장과 원로들에 의해 부족이 운영되었다. 오랜세월 팔라우 원주민들은 농업과 어업, 수렵과 같은 당양한 생업에 종사하며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보존하여 왔다. 16세기경, 팔라우의 여러 부족들은 내부 갈등과 외부 위협으로 인하여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통합으로 팔라우에는 나라차마용 왕국(Ngarachamayong)이 처음 건국되었고 초대 왕, 이베둘(Ibedul)

고대 나라차마용 왕국의 유적지

이 통치하며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맞이하게 된다. 이베둘을 이어 그의 아들 레체부(Rechebu, 17세기 초)가 왕이 되었고 레체부를 이어 그의 아들 이베둘 아케텍(Ibedul Aketek, 17세기 중반)이 왕이되어 라차마용 왕국을 잘 이끌어갔다. 이들 왕들은 군사적 지도자들로서 정치적으로 부족간의 갈등을 잘 조절하였고 16세기 후반의 유럽 열강들의 위협에도 잘 대응하였다. 1521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마젤란(Fernando de Magallanes)이 팔라우에 도착하였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경로를 탐색하다 팔라우를 발견하고 상륙하였으며 이때 팔라우 외에도 주변의 여러 섬(미크로네시아 제도)을 탐험하고 스페인의 중요한 항로를 개척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6세기 중반, 스페인 탐험가들이 팔라우에 다시 도착하였다. 1543년, 이바르 보르한(Inigo O`nez de Retes)과 그의 동료들이 처음 팔라우를 탐함한 것을 기록하여 문서로 남겼다. 이것으로 인하여 팔라우는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페인은 팔라우의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을 파악하여 대서양과 태평양의 중간 기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팔라우 주변의 여러 다른 태평양 섬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1606년에는 스페인의 알론소 데 살라자르가 팔라우의 여러 섬들을 탐험하여 지도 작업을 하였으며 17세기 초, 벨라스코(Luis de Velasco)라는 스페인 군인이 팔라우를 탐험한 후 기록으로 남겼다. 벨라스코는 스페인의 식민지 정부에서 일했던 군인으로서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확장을 위하여 팔라우와 미크로네시아 및 태평양 섬들을 탐험하였다. 벨라스코는 팔라우 원주민과의 접촉을 통해 원주민 문화에 대하여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팔라우와 그 주변 섬들이 태평양의 군사적 기지로, 또 상업적 해상 무역의 거점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여 스페인의 식민지 정책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스페인은 팔라우를 해상 무역의 거점으로 삼고 중국과 필리핀 등 대서양, 태평양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며 활발하게 무역을 하게되었다. 1852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팔라우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하게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였고, 팔라우 전역에 학교를 세워 원주민들의 교육에도 힘썼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팔라우는 카톨릭 신자들이 대부분이며 카톨릭은 팔라우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종교이기도 하다. 나라차마용 왕국(Ngarachamayong)이 언제, 어떻게 멸망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스페인, 독일, 일본의 식민지로 인해 나라차마용 왕국의 왕권이 무너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19세기 후반, 스페인은 내전과 여러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약해졌다. 1885년, 태평양 식민지 확장을 목표로 삼았던  독일은 이때를 기회로 삼아 스페인과 경제적 보상에 대한 조약을 맺음으로서 팔라우와 미크로네시아 지역은 독일에 매각되어 독일이 지배권을 얻게된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국력이 더욱 약화되어 더 많은 식민지를 잃게 되었으며 이로인하여 독일은 팔라우에 대한 더 확실한 지배권을 얻게되었다. 1895년,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가 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미국은 이러한 쿠바의 독립을 지원하였다. 1898년, 2월 미국의 메인(USS Maine) 전투 함대가 쿠바의 하바나 항에 도착하였다. 공교롭게도 이날 전투함이 폭발하였고 260며이 사망하게 된다. 미국은 이것을 스페인의 소행으로 몰아갔으며 미국 여론을 선동하여 결국 1898년 4월, 스페인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서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Spanish-American War)이 발생하게 된다. 미국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 필리핀, 괌, 사이판 등에서 스페인과 전투를 치루었다. 1898년 7월 1일, 쿠바의 산 후안 언덕 전투(Battle of San Juan Hill)는 가장 유명한 전투이다. 미국의 육군, 루스벨트 대위가 이끄는 자원병들(Rough Riders)이 미국 정규군과 함께 산 후안 언덕을 점령하기 위하여 스페인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에게 치명적 피해를 입히게 되었고 산 후안 언덕을 점령하게 된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하바나 항구를 포위했던 스페인 군대는 퇴각하게 되었다. 루스벨트 대위는 이 전쟁으로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이 전쟁이후, 결국 미국이 승리하고 스페인이 패전하게 됨으로서 1898년 12월 미국과 스페인이 맺은 파리 조약(Tratado de Paris)에 따라 괌과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등 여러 지역이 미국의 지배를 받게된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세계적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스페인 제국은 붕괴되었다. 스페인에게 미크로네시아와 팔라우를 매입한 독일은 미크로네시아 제도의 여러 섬들과 팔라우를 식민지로 삼고 1914년까지 통치를 하게된다. 독일은 팔라우의 자원을 착취하였고 팔라우 경제와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14년 6월 28일,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일본, 세르비아, 벨기에, 포르투갈,루마니아, 그리스 등의 연합국과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등 동맹국들이 4년 동안 여러 전장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이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된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일본은 식민지 확장을 목표로 태평양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1900년대 초, 일본은 조선과 만주, 중국에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태평양으로 진출하면서 팔라우를 전략적 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일본은 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의 식민지였던 팔라우를 포함한 미크로네시아 여러 섬을 점령하였고 1945년까지 31년 동안 팔라우를 식민지로 통치하게 되었다. 1919년, 1차 세계 대전 종전후, 일본은 국제 연맹(League of Nations)으로부터 팔라우에 대한 공식적 위침 통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팔라우와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공식적으로 관리하게 된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팔라우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되었으며 팔라우는 미국의 신탁 통치를 받게 된다. 스페인, 독일, 일본의 식민지배와 1차, 2차 세계 대전의 전투지였던 팔라우는 많은 인명적 피해와 도시들이 파괴되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신탁 통치 속에,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팔라우는 정치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1979년 팔라우는 자치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고 1994년 팔라우는 미국과 자유연합 협정(Compact of Free Association)을 체결하여 독립 국가로 인정을 받게된다. 이 협정으로 미국은 팔라우의 국방을 책임지며 팔라우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게 됨으로서 팔라우는 미국의 태평양 지역의 방위 전략에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 팔라우의 정치

팔라우의 정치는 민주적 제도를 바탕으로 한 대통령제 공화국으로서 대통령이 국가와 정부의 수반이며 입법부, 행정부,사법부의 삼권 분립 국가이다. 행정부의 수장은 대통령이며 재임이 가능한 4년 임기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다. 부통령도 함께 선출되며 부통령은 대통령을 보좌한다. 대통령은 내각을 임명하고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한다. 팔라우는 16개의 주로 구성되었으며 각 주는 자체적으로 주 정부를 운영하고 주 법에 따라 지방 자치와 행정을 담당한다. 입법부는 16명의 하원과 13명의 상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이며 하원은 각주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되고 상원은 전체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팔라우의 입법  활동을 담당한다. 하원은 법안을 발의하고 입법 절차에 참여하며 법률을 제정하고 정부의 정책을 감시, 대통령의 정책을 견제한다. 팔라우의 사법부는 독립 체계로 운영되며 헌법에 따라 법률을 해석하고 판결한다. 최고 법원은 팔라우 대법원이있다. 팔라우의 정치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시민들의 직접 선거와 선출 제도를 가지고 있다.

1994년, 독립 이후 자유연합 협정(Compact of Free Association)에 따라 외교와 국방은 미국과 협력한다.

- 팔라우의 경제

1994년 10월 1일, 팔라우가 독립하면서 발효되었던 자유연합 협정(Compact of Free Association)은 팔라우에 미국의 경제 지원을 이끌어 냈으며 이것은 팔아우의 인프라, 교육, 보건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을 가져왔다.

협정 초기 15년 동안은 연간 1억 5천만 달러(한화 약 2조 250억원) 이상 미국은 팔라우에 경제 지원을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팔라우 시민들은 미국 비자없이도 미국에 입국하여 유학하거나 직업 활동을 할 수 있으며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있게 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지원 속에서, 팔라우 경제는 관광업, 어업, 농업, 소규모 제조업들이 발전하게 되었다. 팔라우의 경제중 가장 큰 비중은 관광업이다. 팔라우는 아름다운 해양 생태계, 산호초, 블루홀, 락 아일랜드, 젤리피쉬 호수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가진 나라이다.

2019년, COVID-19 팬데믹으로 경제가 크게 타격을 받았지만 미국의 경제 원조로 인하여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팔라우는 참치 어업이 활발한 나라이며 수출로도 이어져 외화 수입을 얻고 있다. 2015년, 팔라우는 국가 해양 보호 구역을 설정하여 해양 자원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팔라우의 농업은 소규모이며 생산이 제한적이다. 주요 작물은 타로, 바나나, 코코넛, 야채 등이지만 규모가 작아서 대부분 식량을 수입에 의존한다.

팔라우의 제조업 또한 작은 규모이며 주로 농산물 가공, 소비재 생산이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팔라우 경제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은 미국의 경제 지원이며 팔라우가 독립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경제를 지원하고 있다.

- 팔라우의 교육

팔라우의 교육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과정으로 진행된다. 3세~5세까지 유치원에서 조기 교육이 진행되며, 6세부터 12세까지, 6년동안 읽기, 쓰기, 산수, 사회 과목 등 기초적인 초등학교 교육이 진행된다. 중학교 과정은 3년이며 고등학교는 4년 과정으로 대학 진확을 준비한다. 주요 대학에는 팔라우 커뮤니티 칼리지(Palau Community College), 팔라우 대학교(University of Palau), 팔라우 기술 학교(Palau Techhical School), 해양 연구소(Palau International Coral Reef Center)이 있다. 팔라우의 교육은 인재 양성과 경제 발전을 목표로 교육 개선을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하며 외국의 원조와 지원도 받고 있다.

 

3. 팔라우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팔라우의 유적지

팔라우 벨라우루라 유적지

팔라우에는 전통적 생활 방식과 고대 문화와 역사를 지닌 여러 유적지들이 있다. 벨라우 루라 유적지(Babeldaob Ruins)는 팔라우에서 가장 큰 섬인 벨라우 루라에 위치한 유적지로서 석조 구조물과 고대 마을의 유적지이다. 모레크 구명(Melekeok)은 나라차마용 왕국의 수도로서 고대 팔라우의 고대 사회를 부여주는 유적지이다. 올롱페크(Olong)는 팔라우의 고대 화살촉과 조각품이 발견된 유적지이다. 팔라우의 전통마을(Traditional Villages)들은 고대의 건축 양식과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유적지이다.

- 팔라우의 자연 경관

팔라우 스페인 동굴

록 아일랜드(Rock Islands)는 석회암 섬들로 이루어진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이다. 블루홀(Blue Hole)은 깊은 바다와 맑은 물이 매력적이며, 젤리피쉬 호수(Jellyfish Lake)는 젤리피쉬가 서식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팔라우 내셔널 마린 생태계(Palau National Marine Sanctuary)는 해양 자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구역으로 설정된 곳이며 모레크 폭포(Melekeok Waterfall)의 시원한 물줄기 아래에서 수영을 즐길수 있다. 팔라우에는 여러 동굴이 있는데, 스페인 탐험가들이 방문했던, 스페인 동굴(Spanish Cave),

고대 팔라우 원주민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던 타미스 동굴(Tammis Cave), 고래의 전설과 관련이 있는 고래 동굴(Whale Cave) 등이 있다. 또한 팔라우에는 열대 우림과 풍부한 동. 식물들의 서식지이기도 한다.

 

 

바다가 만든 나라, 팔라우는 아름답고 풍부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독특한 섬나라이다. 블루홀, 록 아일랜드, 젤리피쉬 호수와 같은 관광 명소가 있으며 다양한 동.식물의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바다와 팔라우가 만든 열대 우림과 자연경관은 경이롭다. 그러나 자원 부족, 기후 변화, 교육적 기회, 환경 보호 등의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 나라이며, 지속 가능한 교육과 환경 보호는 팔라우의 미래를 결정 짓는다. 따라서 팔라우는 그 자체로도 귀중한 자산이 될 수 있기에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