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의 정식 명칭은 아이스란드 공화국(Island)이다. Island는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하였으며 얼음을 뜻하는 I`s와 땅을 뜻하는 land의 합성어이다. 아이슬란드는 9세기경,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이 아이슬란드 섬 북쪽을 탐험하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빙하를 보고 붙여진 이름이다. 아이슬란드의 공용어는 아이슬란드어이며 아이슬란드어는 게르만족어에 속하는 어군으로서 노르드어와도 매우 비슷하다.
게르만어(Germanic languages)는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군이며 서게르만어(영어, 독일어, 네델란드어), 동게르만어(현재 소멸된 고트어), 북게르만어(노르드어로서 아이슬란드, 덴마크어, 스웨덴어 등)로 다양하게, 하위 언어들로 가지를 쳤다. 노르드어(Old Norse)는 북게르만어군에 속하며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그 주변에서 8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사용되었던 고대 언어이다. 즉 노르드어는 바이킹들에 의해 사용된 언어로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으로 퍼져나갔다.
1. 아이슬란드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아이슬란드의 영토와 수도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는 유럽과 그린란드 사이의 북대서양에 위치한 섬나라이며 총 면적은 103,000 제곱킬로미터이다. 서북쪽은 그린란드, 동쪽은 노르웨이와 스웨덴, 남쪽은 영국을 마주보고 있으며 지형의 특징은 화산과 빙하가 특징이다. 아이슬란드의 수도는 레이캬비크(Reykjavik)이며 수도 면적은 273 제곱킬로미터이다. 수도 레이캬비크의 인구는 13만명이며 이것은 아이슬란드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한다. 레이캬비크는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도시로서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 아이슬란드의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아이슬란드의 인구는 38만 7천명이며 이는, 전체 면적에 비하여 인구 밀도가 낮다. 아이슬란드의 인종은 게르만계와 켈트계가 혼합된 인종이며 최근에는 이민자들의 증가로 아이슬란드에도 다민족, 다문화, 다인종이 형성되고 있다. 현재 90%는 아이슬란드인이며 나머지 10%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2. 아이슬란드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아이슬란드의 역사
아이슬란드의 역사는 고대와 중세, 식민시대와 현대로 구분된다. 불과 얼음으로 뒤덮여진 아이슬람드에 사람이 처음 이주하여 살아던 시대는 874년경으로 전해진다.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함으로서 아이슬란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3세기에 아이슬란드의 역사를 기록한 스노리 스툴루손(Snorri Sturluson)의 저서에 바이킹들의 아이슬란드 이주와 정착에 대하여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12~14세기 사이에 기록된 사가(Saga) 문학에서도 초기 아이슬란드 역사들을 다루고 있다. 이슬렌
딩가 사가(Islendinga saga)는 주로 9~11세기까지 아이슬란드 초기 정착 시기에 대한 내용들로서, 정착민들이 아이슬란드에서 어떻게 정착지를 세웠는가...? 어떻게 생존하고 공동체를 세워나갔는가...?에 대한 내용이 중심이다. 초기 정착민들이 극한의 자연 환경에 맞서 싸우고, 어떻게 농업과 어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는지를 다룬다. 대표적 인물들은, 잉골푸르 아르나르손(Ingolfur Arnarson)과 할베그 프로다도티르(Hallveig Frooadottir) 부부와 잉골푸르의 친구인, 그리무르 켈두르손(Grimur Kalfsson)이다. 에길의 사가(Egils saga)에서 주인공은 시인이며 전사인, 에길 스칼라그림손(Egil Skallagrimsson)이다. 에길은 10세기의 전형적인 바이킹으로서 에길의 모험이 주요 내용이다. 에길의 사가에서는 에길과 그의 가족들이 노르웨이서 어떤 집안이었는지에 관하여, 또 아이슬란드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어떤 전투들을 치루었는지에 관한 여러 전투들을 다룬다. 에길은 강력한 전사이며 시를 통해 그의 마음과 상황을 표현하였던 예술가로도 묘사된다. 또다른 사가는 녹색 땅의 사가(Saga of the Greenlanders)와 에이릭의 사가(Eirik the Red`s Saga)가 있다. 이 두 사가는 그린란드와 북아메리카(핀란드)를 탐험하였던 아이슬란드의 초기 정착민들의 탐험에 관한 내용들이다. 내용의 중심 인물은 에이릭 라우디(Eirik the Red)와 그의 아들 레리프 에이릭손(Leif Erikson)이 핀란드와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정착을 시도했던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874년, 초기 정착민들의 이야기로 다시 가보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바이킹들이 아이슬란드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지를 세우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거주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노르웨이의 정치적 갈등을 피해 아이슬란드의 북서쪽에 위치한 불라다르(Borgarfjorour)로 이주하여 정착지를 세운 바이킹들의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이들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켈트계 사람들도 함께 정착하게 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들이 정착한, 불라다르 지역은 강과 호수, 비옥한 땅으로 이루어져 추운 아이슬란드에서도 농업과 어업에 적당한 자원과 환경이 조성된 곳이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정착하기에 불라다르는 적합한 지역이었으며 이들의 공동체를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또다른 정착지 이야기는 이슬렌딩가 사가의 주인공인, 잉골푸르 아르나르손(Ingolfur Arnarson)과 그의 아내 할베그 프로다도티르(Hallveig Frooadottir) 부부와 잉골푸르의 친구인, 그리무르 켈두르손(Grimur Kalfsson)에 관한 내용이다. 잉골푸르 아르나르손과 할베그 프로다도티르 부부 역시, 노르웨이의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피해서 이곳 아이슬란드로 피신한 사람들이었다. 잉골푸르 아르나르손 부부는 지금의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에 도착하여 최초로 정착지를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은 그의, 의자 기둥을 바다에 던진 후 기둥이 떠내려 온 곳에 정착지를 세우겠다고 다짐한 후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그곳이 지금의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이다. 잉골푸르는 초기 정착시대에 최초의 지도자로서 법과 질서를 수립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 다른 이주민은 잉골푸르의 친구인, 그리무르 켈두르손(Grimur Kalfsson)이다. 그리무르는 잉골푸르와 함께 노르웨이에서 출항하여 아이슬란드에 도착하여 레이캬비크에서 70km 거리의 보르가르네스(Borgarnes)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보르가르네스는 현재 1,700명이 거주하는 상업과 서비스의 중심도시로 아이슬란드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알려진 또 다른 이름은 홀가르드 리드하르드손(Hallgrimur Raoolfsson)이다. 홀가르드 리드하르드손의 이야기는 스노리 스툴루손의 책에 소개되지 않으며 초기 정착민으로만 전해져온다. 초기 정착민 시대, 아이슬란드의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잉골푸르와 홀가르드이며 이들은 당시 법과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아이슬란드 사회가 형성되는데 큰 역활을 담당한 것으로 소개된다. 930년, 아이슬란드 초기 정착민들은 알씽기(Allpingi)라는 의회를 설립하였는데, 이 이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로 알려졌다. 알씽기 의회는 매년 여름마다 정착민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법률을 토의하고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였는데 이것은 아이슬란드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알씽기는 1845년까지 지속되다가 그후 지금의 의회 형태로 전환되었다. 1000년경, 아이슬란드에는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0세기 후반부터, 노르웨이 왕, 올라프 1세(Olaf Tryggvason)는, 아이슬란드에 기독교 전파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그결과 아이슬란드의 지도자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아이슬란드 최고 입법부, 의회(알씽기)는 기독교를 아이슬란드의 공식적 국교로 채택하였다. 당시 아이슬란드에는 켈트족을 비롯하여 여러 이교도들도 함께 살고 있었기에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할 경우 종교적 갈등이 발생할 위험이 있었다. 당시 법무관이었던 소르게르(Thorgeir Thorkelsson)는 하루동안 침묵과 명상을 하며 깊이 생각한 후 결국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대신 소르게르는 이교도들에게 몇가지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노르드 신들을 숭배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허용되었고, 이교도 의식으로 아이를 출산 한 후 유기하는 행위도 허용되었다. 이러한 결정으로 오히려 큰 충돌없이 아이슬란드는 종교적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독교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이교적 관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되면서 아이슬란드의 법과 사회적 관습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기독교의 영향으로 중세 아이슬란드는 문자 기록이 본격화 되어 성직자들의 라틴어 교육과 구전된 아이슬란드의 전승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사가(Saga) 문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930년에 조직된 아이슬란드의 알씽기(Althingi)는 12세기까지 아이슬란드의 중심적 입법 기관으로 자리잡았으며 아이슬란드의 법을 제정하고 사회적 갈등에 관한 중대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때 그리그스(Gragas)라는 법전이 편찬됨으로서 아이슬란드 사회의 법적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의 정치는 아직 노르웨이, 덴마크로부터 압박을 받지않았던 때였기에 독립적 정치를 유지하며 자체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12세기 중반부터 노르웨이의 왕들은 아이슬란드에 정치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교회의 권력이 더욱 강화되어 교회는 법률, 교육, 사회적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사가(Saga)와 같은 문학 장르가 발전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13세기 중반 이후, 스투를룽(Sturlung Age) 가문이 등장하여 막대한 부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스투를룽 가문은 아이슬란드 의회(알씽기)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국가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스투를룽 가문은 많은 토지와 많은 추종자들을 통해 지역 사회를 장악하여 소왕국 형태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13세기 중반에는 스투를룽 가문의 등장으로 아이슬란드가 혼란에 빠진게 된다. 스투를룽 가문이 부와 권력을 기반으로 아이슬란드를 지배함으로서 다른 귀족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이것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진다. 40년 이상 지속된 내전은, 양쪽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며 아이슬란드의 국가 기능(중앙정부)은 마비되고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법과 질서가 파괴되었고, 사회적 인프라도, 경제도 모두 훼손되었다. 이러한 강들과 내분은 결국 아이슬란드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만들었고 아이슬란드 자체적으로는 이 내전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때마침 스투를룽 가문에서 또다시 내부 분열이 일어났으며 권력 다툼으로 가문은 분열되었다. 스투를룽 가문은 다른 귀족들과의 내전 중이었기에 스투를룽 가문의 분열은 더욱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게 되었다. 내전을 수습하기 위하여 일부 아이슬란드 귀족들은 노르웨이의 왕(하콩4세 호콩손, Hakon 4, Hakonsson)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하콩 4세 호콩손은 아이슬란드에 군대를 파견하여 내전에 개입하게 된다. 노르웨이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아이슬란드의 귀족들이 항복을 함으로서 내전은 끝이났다. 내전이 끝난후, 1262년,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이와 "구 언약(Old Covenant)"을 체결하여 공식적으로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에 병합되어 노르웨이의 지배를 받게된다. 독립국가였던 아이슬란드는 이제 정치적, 경제적으로, 노르웨이에 종속되어 식민지배를 받게되었다. 아이슬란드 내전에 노르웨이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북해 제국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는 아이슬란드를 병합시킨 후 행정체제를 개편하여 식민 지배를 강화하였으며, 그러므로 아이슬란드의 독립적 의회였던 알씽기(Althingi)의 권한과 권력도 약해졌다. 14세기의 유럽을 강타하였던 흑사병은 고립된 섬나라, 아이슬란드에도 상륙하였다. 유럽 본토보다 조금 늦은 1402년, 아이슬란드에 상륙한 흑사병으로 인하여 전체 인구의 50%가 사망하게 된다. 흑사병은 안그래도 인구 밀도가 낮은 아이슬란드의 인구를 더욱 급격하게 감소시켰다. 인구 감소는 노동력 부족으로 이어졌고 농업 생산량의 감소로 인해 경제 활동도 위축되었다. 또한 사회 질서가 파괴되고 귀족들의 권력도 약화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처 큰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흑사병과 함께 14세기의 아이슬란드는 화산 폭발로 인한 이중적 고통에 시다려야 했다. 이시기 아이슬란드에서는 대 규모의 화산 폭발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로 인해 토양이 오염되어 농작물 재배가 어려웠으며 가축들의 먹이도 심각하게 부족하였다. 화산재로 인해 태양 빛이 차단되어 가뭄과 추운 날씨,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다. 또한 14세기, 북유럽은 왕위 계승 문제와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정치적인 불안정한 시대였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내적, 외적 위협을 해결하고자 1397년, 덴마크 주도로 스웨덴과 노르웨는 3국 동맹 연합(칼마르 동맹, Kalmar Union:스웨덴 남동부의 한 도시 이름, 이곳에서 동맹이 체결됨)이라는 북유럽 국가 연합체를 형성하게 된다. 칼마르 동맹으로 이 3국 동맹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왕국이 되었으며 이러한 연합을 통해 정치적 안정과 외부의 침략을 해결하려 하였다. 칼마르 동맹은 덴마크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덴마크의 종속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슬란드도 덴마크의 직접적 지배를 받게되었다. 덴마크의 강력한 간섭과 지배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에게는 또 다른 갈등이 되었으며 이러한 갈등은 126년동안 지속된다. 결국 1523년, 스웨덴이 칼마르 동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함으로서 칼마르 동맹은 해체되었다. 15세기의 아이슬란드는 흑사병과 화산 폭발로 인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화산 폭발로 인한 기후 변화는 농업과 어업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 식량 부족으로 인하여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16세기의 아이슬란드에는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칼마르 동맹의 주도 세력인,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3세는 아이슬란드에 루터교를 강제로 도입하였고 이로인하여 카톨릭 교회는 재산이 몰수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잃어갔다. 덴마크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여 무역 독점권을 누렸고 노르웨이가 부여한 아이슬란드의 자치권을 무력화시켜, 행정 체계를 개편하였다. 17세기의 아이슬란드는 덴마크의 강력한 통치아래 침체되고 고립된 상황에 놓였다. 덴마크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무역을 독점하였고 아이슬란드의 경제를 착취하였다. 또한 17세기 초, 북아프리카 해적들이 아이슬란드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1783년, 라키(Lakagigar, 아이슬란드어로 화산 분화구들이란 뜻) 화산이 폭발하여 대 규모 자연재해가 발행하였는데 8개월 동안 화산 분출이 이어져 유럽 전체가 "화산 겨울"이라는 혹독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때 아이슬란드의 20%의 인구가 사망하였고, 가축들이 대부분 죽었다. 화산 가스와 화산재로 인하여 호흡기 질환자들이 대거 발생하였고 토양이 오염되어 아이슬란드 전체 토양이 파괴되었다. 분출된 화산 재는 태양 빛을 가려, 유럽 전체가 화산 겨울이라는 이상 기후를 경혐하게 되었으며 급격한 기온 저하로 인하여 농사가 되지않았고 식량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흑사병, 덴마크의 강력한 식민지배와 해적들의 약탈과 화산 폭발, 대 기근 속에서 아이슬란드는 19세기로 접어든다.
19세기의 아이슬란드에서는 어려운 경제 상황, 덴마크의 억압적 통치에 대한 반발로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에 대한 의식이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아이슬란드는 자치권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집회를 열었다. 덴마크는 이러한 아이슬란드의 요구에 정책을 완화하였으며 그로인하여 1843년, 아이슬란드 의회(알씽기)가 다시 조직되었다. 1874년에는 덴마크로부터 부분적이지만 자치권을 부여받아 점차 자치권을 통해 아이슬란드를 운영하게 되었다. 19세기 중, 후반부터 일어났던 독립 운동의 결실은 20세기에 들어서 열매를 맺게된다. 1918년, 아이슬란드는 덴마크와 동맹을 맺고 확실한 자치권을 얻게 된다. 아이슬란드의 왕은 명목상, 덴마크 왕이었지만 이 자치권은 사실상 독립국 지위와 같았다.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이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을 점령함으로서 덴마크와 아이슬란드의 모든 체계와 연락망은 두절되고 끊어졌다. 따라서 이때부터 아이슬란드는 사실상 완전한 독립 국가 상태가 되었다. 1940년, 아이슬란드는 중립국임을 선언하였지만 미국과 연합군은 아이슬란드가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을 이유로 군대를 주둔시켰다. 아이슬란드는 북대서양 항로의 중간에 위치한 섬이기에 유럽과 북미를 연결하는 중요한 해상 거점이었다. 1940년 5월, 영국은 군대를 아이슬란드에 파견하여 독일의 북대서양 진출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오랜 식민지 생활에 지쳐있었던 아이슬란드 국민들은 영국군의 이러한 군대 파견에 반발하였다. 1941년 7월, 미국은 영국에게 아이슬란드를 넘겨받고 미군을 주둔시켰다. 미국은 아이슬란드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고 함대와 전투기를 배치하여 북대서양 해상 교통을 확보하고 독일의 잠수함 공격을 막으려 하였다. 이때 아이슬란드 방어군이 창설되었고 또 미군과 연합군이 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지 않은 1944년 6월 17일, 아이슬란드는 공화국임을 선언하며 노르웨이와 덴마크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미군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5년에도 아이슬란드에 주둔하였으며, 미군의 철수는 2006년, 소련과의 냉전이 종식 된 이후, 이루어졌다.
1949년 4월 4월, 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하여 유럽은 미국을 중심으로 북대서양 조약 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라는 군사 동맹을 설립하였다. 이때 아이슬란드는 북대서양 조약에 서명함으로서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20세기 후반, 어업을 바탕으로 아이슬란드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교육을 장려하고 사회 복지망을 구축하여 국민의 삶의 질도 향상되었다. 21세기의 아이슬란드는 2008년, 과도한 외채와 부동산 버블 붕괴가 주요 원인이 되어,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하여 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된다. 이때 관광 산업이 새로운 아이슬란드 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특히 북극광, 빙하와 화산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여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게 되었다. 지금의 아이슬란드는 과거의 식민지와 극한의 자연해들로 인해 받았던 모든 상처가 치유되었으며 2008년의 금융 위기또한 치유되어 새롭게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2019년, COVD-19 팬데믹으로 인하여 또 다른 위기를 겪었지만 이것 또한 잘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아이슬란드의 정치
불과 얼음의 나라이며 북유럽의 작은 국가, 아이슬란드의 정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알씽기)를 가진 민주주의 국가로서 대통령과 국회를 중심으로하는 민주 공화국이다. 알씽기(Allpingi)는 930년에 설립된 아이슬란드 의회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이다. 국가 원수는 대통령이지만 대통령은 의전적 역할을 수행하고 실질적 권한은 의회(알씽기)와 내각에 있다. 의회는 63명의 의원들로 구성된 단원제이며 임기는 4년이다. 주요 정당에는 아이슬란드 사회 민주당, 아이슬란드 독립당, 아이슬란드 진보당 등이 경쟁한다. 아이슬란드의 사법부는 독립적이며 대법원과 지급 법원으로 이루어져있다.
- 아이슬란드의 경제
아이슬란드는 작은 섬나라이지만 부강한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자원이 풍부하여 에너지 산업과 관광 산업으로 경제가 성장하였다. 2023년 기준, 아이슬란드의 GDP는 310억 달러(한화 41조)이며 이것은 2022년에 비해 14% 성장한 것이만 세계 경제 규모에 비하면 매우 작은 경제 규모이다.
그러나 2023년 기준, 아이슬란드의 1인당 GDP는 8만달러로서 세계 상위권(10권 이내)이며 자원을 기반으로 한 경제는, 지열과 수력 발전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고 수출함으로서 경제 성장을 이루어왔다. 어업은 오랜 아이슬란드의 경제를 지탱해온 업종으로서 고부가가치 어류 가공 산업도 발달되어 있다. 관광업은 아이슬란드의 주요 외화 수입원이며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인하여 관광 산업이 급성장하였다.
- 아이슬란드의 교육
아이슬란드의 교육은, 교육의 수준과 질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세부터 16세까지,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은 의무 교육으로 진행된다. 6세부터 16세까지 10년 과정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통합된 형태로 읽기, 쓰기, 과학, 수학, 사회, 예술 등 기본적인 과목들로 진행된다. 고등학교는 3년과정이며 대학 진학과 전문 기술 교육을 공부한다. 아이슬란드에는 여러 공립 대학교들이 있으며 주로 3년에서 4년 과정의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이 진행된다. 주요 대학에는 아이슬란드 대학교(University of Iceland), 아쿠레이리 대학교(University of Akureyri), 레이캬비크 대학교(Reykjavik University), 비프뢰스트 대학교(Bifrost University), 호라르 대학교(Holar University), 아이슬란드 미술 대학교(Iceland University of the Arts)와 같은 대학들이 있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혁신적 정책들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3. 아이슬란드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아이슬란드의 유적지
아이슬란드는 바이킹 시대부터로부터 전해지는 유명한 유적들이 있다. 팅벨리어 국립공원(Pingvellir National Park)은 알씽기(Althingi)가 설립된 역사적 장소이다. 스카프타펠 국립공원(Skaftafell National Park)은 빙하와 폭포로 유명하지만 고대 아이슬란드의 농업에 관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레이캬비크의 하르파 콘서트홀(Harpa Concert Hall)은 현대적 건출물이지만 아이슬란드의 문화와 예술을 대표하는 곳이다. 바르다르바르(Borgarfjorour)는 아이슬란드의 초기 정착과 관련된 유적지로서 특히 13세기의 역사학자 스노리 스툴루손(Snorri Sturluson)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아이슬란드 전역에는 고대 바이킹들의 집터와 유물들이 많이 존재한다.
- 아이슬란드의 자연 경관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는 화산, 빙하, 해안 등 다양한 자연 경관이 어우러져 있다. 아이슬란드의 가장 유명한 자연 경관은 빙하이다. 빙하는 아이슬란드의 11%에 해당하는 국토를 차지한다. 가장 유명한 것은 빙하가 녹아 내려서 만들어진 요쿨살론 빙하 석호(JokuIsarlon Glacier Lagoon)이다. 스카프타펠(Skaftafell)은 바트나요쿨 빙하 국립 공원에 위치하여 빙하 동굴 투어와 하이킹을 할 수 있다. 굴포스(Gullfoss)는 황금 폭포라는 뜻이며 아이스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폭포 중 하나이다. 스코가포스(Skogafoss) 폭포는 해적들이 폭포 뒤편, 동굴에 보물을 숨겨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고르푸스(Gooafoss)는 아이슬란드의 전설과 관련된 폭포로서 신들의 폭포라는 뜻이다. 아이슬란드는 화산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 레이캬네스 반도(Reykjanes Peninsula)는 화산 활동으로 인하여 간헐천이 용암 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아스키아 화산(Askja Volcano) 안에는 화산 호수가 있고 용암 사막이 있다. 지열지대와 간헐천(Geyser)또한 아이슬란드에서 유명한 관광지이다. 게이시르 지열지대(Geysir Geothermal Area)는 몇분 간격으로 뜨거운 지열을 뿜어 올리는 것으로 유명하다(스트로쿠르 간헐천). 블루라군(Blue Lagoon)은 지열 온천이며, 화산 지열을 이용하여 푸른색의 물로 이루어진 온천이다. 북극광(Northern Lights)은 아이슬란
드의 대표적 관광상품이다. 아이슬란드는 가을부터 봄까지 아름다운 북극광(오로라)을 감상할 수 있다. 팅벨리어 국립 공원(Pingvellir Nationnal Park)은 알씽기(Althingi)가 설립된 역사적 장소로 유명하지만, 그외에도 유라시아 대륙판과 북미 대륙판이 갈라지는 곳으로서 독특한 지형을 자랑한다. 실프라 협곡은 두 대륙판 사이를 직접 걷거나 하이킹 할 수 있는 곳이다. 쉬르트세이 섬(Surtsey)은 1963년, 해저 화산 폭발
로 생겨난 섬이다. 비크(Vik)는 아이슬란드의 상징적 풍경이며, 바닷가 바위에 서있는 레이니스드랑가르 바위와 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하다. 레이니스피야라(Reynisfjara) 검은 모래 해변은 유명한 곳이며, 요크살론 빙하 석호 근처에 있는 다이아몬드 해변(Diamond Beach)도 유명하다. 디르홀레이(Dyrholaey)는 아치형 바위와 등대로 유명하다. 아이슬란드의 해변은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현무암이 파도에 쓸려 검은 모래 해변을 만들고 있다. 또한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빙하 조각들이 해변을 떠돌고 있으며 해안가의 기암절별들도 유명하다.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는 북극광, 빙하, 폭포, 간헐천, 화산, 검은 모래와 해변, 기암절벽, 빙하 석호 등 다양한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며 바이킹들의 역사와 문화가 아이슬란드 전역에 묻어있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 유적들과 현대의 자연경관 속에서 도시들이 조화롭게 조성도어진 매력적인 나라이다. 오랜세월 식민지배와 흑사병, 지열활동과 화산폭발과 대 기근이 여러차례 반복되었지만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극한의 환경과 싸우며 불과 얼음 속에서도 1인당 GDP가 8만불인, 지금의 아이슬란드를 만들었다. 아이슬란드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역사적 가치가 공존하기에 관광객들에게 좋은 여행을 제공하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