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의 정식 명칭은 북 아일랜드(Nothern Ireland)이며 1921년, 잉글랜드(영국)-아일랜드 조약 이후 사용된 이름이다. 이 조약에 따라 아일랜드는, 남쪽과 북쪽,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카톨릭 신자가 많았던 남쪽은 1922년까지 영국의 독립적 자치령(아일랜드 자유국, Irish Free State, 1922년)이었다가 1949년, 아일랜드 공화국(Republic of Ireland)으로 분리되었다. 프로테스탄트가 많았던 북 아일랜드(Northern Ireland)는 영국의 일부로 남게되었으며 자치권을 가진 정부를 운영하면서 공식 명칭은 북 아일랜드로 불려진다. 따라서 북 아일랜드라는 명칭은 지리적 위치에서 유래한 것이다. 북 아일랜드의 모든 도시들(6개 지역)이 아일랜드 섬의 북,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북부를 뜻하는 "Northern"와 아일랜드 섬을 뜻하는 "Ireland"가 합쳐져 북 아일랜드(Nothern Ireland)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북 아일랜드는 영국을 구성하는 네개의 국가중 하나로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영어는 일상적 의사 소통, 정부 업무, 학교와 교육, 미디어 등 모든 분야에서 사용된다. 소수언어로는 북 아일랜드의 전통적 언어인 아일랜드어(게일어, Gaeilge)가 사용되며, 북 아일랜드의 일부 지역에서는 얼스터 스코틀랜드어(Ulster Scots)가 사용되고 있다. 게일어는 고대 켈트족 언어의 한 계열로서 아일랜드 전체에서 사용된 언어이며 이것이 잉글랜드와 병합되면서 영어가 널리 사용되다보니 점차 소멸되어 지금은 북아일랜드 일부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얼스터 스코틀랜드어는 스코틀랜드의 저지대에서 사용된 방언이며 영어와 유사하다. 영국정부는 얼스터 스코틀랜드어를 공식적 언어로 인정하고 있다.
1. 북 아일랜드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북 아일랜드의 영토와 수도
북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의 북동부에 위치한 영국의 자치령이며 총 면적은 14,130 제곱킬로미터이다. 수도는 벨파스트(Belfast)이며 면적은 132,5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34만 5천명으로서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로서 광역권을 포함하면 67만명에 이른다. 아일랜드는 26개 지역으로 아일랜드 섬 전체의 5/6를 차지하며, 북아일랜드는 6개 지역으로 아일랜드의 1/6을 차지한다. 북아일랜드를 남북으로, 반으로 가르면 남서북은 아일랜드 공화국과 499Km의 경계선을 이루며, 남동북은 북대서양(Atlantic Ocean), 아이리시해(Irish Sea)와 경계를 이룬다. 또한 남동쪽 아이리시해 건너 21,5km 거리에는 맨섬(Isle of Man)이 있다.
북아일랜드는 서쪽을 제외하면 삼면이 바다로 둘려쌓여있으며 이 해안선의 총 길이는 1,620Km에 이른다.
- 북아일랜드의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북아일랜드의 인구는 189만명, 백인이 95%이상으로서 인구 비율이 가장 높으며 대다수 아일랜드계와 스코틀랜드계이다. 그외 중동계, 아시아계, 아프리카계를 포함한 다른 인종은 5%정도의 다양한 인종이 포함된다.
2. 북아일랜드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북아일랜드의 역사
북아일랜드는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과 정치, 종교, 민족적 갈등들로 구성되어 있다.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고대와 중세, 영국의 식민지, 아일랜드 독립기, 근대와 현대로 구분된다.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B.C. 7세기부터 B.C.1세기까지 켈트족의 여러 부족들이 유럽 대륙에서 북아일랜드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 시작된다. 대표적 부족들은 우이부족(Ui Neill, 안드림, 다운, 아르마 지역), 울스터(Ulster), 다이(Daigh), 루라(Luighne), 콘나흐(Connacht), 다르하(Darha), 코너(Konair), 더러(Derry), 맥레르(Mac Lir), 너미(Nemi), 다르하(Daire), 레일레(Reile), 센단(Sendann) 등이 있으며, 이들은 농업과 목축업을 주업으로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형성하였고 독립적 정치 제계를 갖춘 강력한 부족 중심의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울스터 부족은 당시 가장 강력한 부족 중 하나였다. 이들 부족 사회는 왕, 드루이드(제사장), 귀족, 평민, 등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졌으며 "드루이드(Druids)"가 중심이되어 부족 국가가 운영되었다. 드루이드는 왕의 정치에 참여하여 조언(책사역할)을 하였고, 켈트족의 전통과 역사를 구전으로 보존하고 전하는 지식적 그룹으로서 의학, 천문학, 수학, 법률 등 다양한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법률(브레혼 법, Brehon Law)과 도덕적 규칙을 정하여 가르쳤으며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A.D.1세기와 2세기의 북아일랜드는, 이들 부족들이 영토 확장을 위해 서로 대립하고 전투를 벌였으며 그중 울스터 왕국은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 중 하나로서,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여러 부족이 통합된 형태로 운영된 국가였다. 울스터 부족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코너 부족과 콘나흐 부족은 자주 충돌하고 전투를 벌였는데 콘나흐 부족의 여왕 메이브(Queen Meave)와 울스터 왕국의 쿠 훌린의 전쟁은 아일랜드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이다. 울스터 서사시(Ulster Cycle)에는 이러한 부족들과 관련된 전설을 다루고 있다. 고대의 전설은 대부분 왕이나 영웅을 신격화한 것이 대부분이다. 울스터 서사시의 주인공은 게일어로 "강력한 전사"라는 뜻을 가진 "쿠 훌린(Cu Chulainn)"이다. 쿠 훌린은 북아일랜드에 정착한 울스터 왕국의 전설적인 전사로서 아일랜드 신화에서는 초자연적 힘을 가진,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가진 영웅으로 묘사된다. 콘나흐 왕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콘나흐 왕국의 여왕 메이브는 울스터 왕국을 침략하여 쿨리의 황소(Bull of Cooley)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당시 울서터 왕국은 전사들이 병에 걸려 전투에 나갈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쿠 훌린이 단독으로 메이브의 군대와 전투를 여러 차례 벌이면서 콘나흐의 군대가 진군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콘나흐 왕국에는 페르타(Ferdiad)라는 막강한 전사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페르타는 쿠 훌린의 친구이며 전투 능력을 존중하며 함께 훈련했던 동료이기도 하다. 그 친구, 페르타가 콘나흐 왕국 사람이며 메이브 여황의 전사로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두 전사는 서로 친구이지만 서로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으며 결국 페르타는 쿠 훌린에게 죽임을 당한다. 쿠 훌린은 페르타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과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계속 콘나흐 군대와 전투를 해야 했다. 초인적 힘과 초인적 전투력으로 콘나흐의 여러 영웅적 전사들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만 메이브 여왕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전투를 지휘하였다. 쿠 훌린은 왕국을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전투를 치루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메이브 여황은 원하는 울스터 왕국의 황소를 소유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메이브 여왕은 많은 전사들을 잃었으며 콘나흐 왕국은 갈등과 분열로 혼란에 빠졌으며 왕국은 큰 손실과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쿠 훌린과 메이브 여왕의 이, 이야기는 수세기 동안 구술로 전해지다 후대의 문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1세기까지 북아일랜드의 여러 부족들은 서로 견제하며 동맹과 전투를 통해 서로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1세기에는 로마 제국의 관심이 아일랜드 전체를 향했지만 정복되지는 않았으며 로마 제국의 직접적 지배도 받지 않았다. 단지 금과 은 같은 상업적 무역과 문화적 접촉으로 아일랜드는 로마의 영향으로 오히려 발전하게 되었다. 2세기에서 4세기까지의 북아일랜드는 울스터 왕국이 부각된 시기로서 울스터 서사시(Ulster Cycle)가 이 시기에 발전하였으며 제사장 계급의 "드루이드"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던 시기였다. 5세기(432년)의 북아일랜드는 "패트릭(Saint Patrick)" 선교사의 선교 활동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북아일랜드에서 기독교는 드루이드 제사장들이 지배하였던 켈트족 종교와 충돌과 융합 과정을 반복하면서 기독교화되어갔다. 울스터 왕국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북아일랜드에서 영향을 행사하였고 각 부족은 부족 국가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기독교와 함께 사회 구조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6세기의 북아일랜드는 기독교가 깊이 뿌리 내렸던 시기로서 수도원들이 건축되고 학문과 예술이 수도원 중심으로 번성하게 된다. 아르마 수도원(Armagh Monastery, 445년), 데리 수도원(Derry Abbey, 546년), 벵고르 수도원(Bangor Abbey, 558년)은 북아일랜드 수도원 문화의 중심이었으며 라틴어로 문서를 기록하고 보존하며 성경을 필사하여 제작된 필사본을 켈트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기독교가 뿌리내린 북아일랜드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기독교의 많은 영향을 받게된다. 7세기에도 벨리클론 수도원(Ballyclough Monastery), 클론타프 수도원(Clontarf Abbey), 비르롤터 수도원(Birr-Loter Abbey)과 같은 크고 작은 수도원들이 계속해서 설립되고 성장해갔으며 7세기 중반부터는 로마식 기독교 교리가 북아일랜드에 확산되었다. 664년, 아일랜드 교리와 로마 교리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헨드론 회의(Synod of Whitby)"가 열렸으며 이 회의에서 로마 교회를 따르기로 결정함으로서 북아일랜드의 기독교 교리도 통일되었다. 7세기에는 "드루이드"가 지배하였던 켈트족 종교가 서서히 쇠퇴하였으며 드루이드들의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795년,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을 중심으로 바이킹들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당시 수도원들은 많은 재물을 축적하고 있었기에 바이킹들의 주요 약탈 대상이 되었다. 이때, 북아일랜드의 라른(Larne) 지역의 라르그(Larne)와 동북부 록 네이(Lough Neagh) 지역의 라그르(Louth)의 수도원들과 동남부의 데리(Derry)시에 있는 여러 수도원들이 약탈을 당했다. 바이킹의 초기 침략은 해안선을 따라 주로 해상 약탈이었으며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에 비해 초기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800년대 초, 북아일랜드의 라겐 왕국(Lagen), 유베르 왕국(Ulaid)을 시작으로 북아일랜드 전역으로 바이킹의 침략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북아일랜드 왕국들은 바이킹에 맞서 싸웠지만 강력한 바이킹의 전투력에 밀려 패퇴하였다. 802년, 바이킹은 라그르(Louth) 의 수도원들을 재차 침략하였다. 이때 아일랜드 동남부에 위치한 유베르 왕국(Ulaid) 군대가 라그르에서 바이킹과 전투를 벌였다.
이 라그르 전투 (Battle of Magh Rath) 에서 유베르 왕국이 패전함으로서 바이킹은 북아일랜드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동시에 아일랜드 전역에서 바이킹들의 정착촌이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정복한 바이킹들은 무역과 군사적 거점으로 더블린을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를 오가는 중요한 항구로 사용하였다. 820년대, 바이킹은 유베르 왕국의 해안과 아르마 왕국(Armagh), 라겐 왕국(Lagen)을 자주 약탈하여 이들 왕국들과 잦은 전투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대규모 전투가 아닌 부분적 약탈과 소규모 전투들이 있었다. 837년, 유베르 왕국의 중심지인 벤부르(Benburb)에 바이킹의 대규모 침략이 일어났다. 유베르 왕국은 바이킹의 해상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맞섰지만 패배하였고 이 지역의 많은 수도원과 교회와 마을들이 약탈을 당했다. 840년, 북아일랜드 왕국들은 바이킹에 맞서기 위하여 동맹을 맺고 여러 전투를 치루었다. 9세기 후반, 바이킹은 북아일랜드의 아르마 왕국의 벨리클론(Ballycloghan)과 유베르 왕국의 데라(Derry)를 반복적으로 공격하였으며 결국 이들 지역은 바이킹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바이킹은 북아일랜드 전역에 정착지와 군사적 거점을 만들고 북아일랜드 왕국들간의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리려 했다. 8세기, 9세기의 북아일랜드 왕국들은, 유베르 왕국(Ulaid), 아르마 왕국(Armagh), 로크 네이 왕국(Lough), 티론 왕국(Tyrone, 혹은 디트 에오가인, Tir Eogain) 등이 있었다. 유베르 왕국은 북아일랜드 남동부와 데리(Derry) 지역을 중심으로, 아르마 왕국은 북아일랜드 중부와 동부를 중심으로, 티론 왕국은 북부 아일랜드의 티론(Tyrone)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들 왕국들은 영토를 두고 14세기, 15세기까지 많은 전투를 치루게 되며, 바이킹에 맞서기 위하여 때로는 연합하기도 하였다.
837년, 바이킹과의 벤부르 전투에서 패배한 유베르 왕국은 계속되는 바이킹의 침략고 약탈로 인하여 왕국의 군사적, 경제적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반면, 9세기 후반부터, 오닐 가문(O`Neill Family)이 티론 왕국을 지배하면서 티론 왕국은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오닐 가문은 유베르 왕국의, 하나의 후손으로 여겨지며, 아일랜드 초기 울라드 왕국(Ulaid)과 전투를 통해 성장하였으며 12세기에는 북아일랜드의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중요한 세력을 가진 왕족으로 자리잡게 된다. 10세기에도 바이킹의 침략과 정착지가 계속 건설되었고 북아일랜드 왕국들과의 충돌도 지속되었다. 아일랜드의 더블린(Dublin)은 바이킹의 상업 중심지, 군사적 요충지가되어 바이킹 왕국이 세워졌으며 이를 통해 아일랜드 전역과 북아일랜드에도 바이킹의 영향력이 더욱 강하게 미치게 되었다. 이시기, 북아일랜드 왕국들은 남쪽 아일랜드의 왕국들인, 먼스터 왕국(Munster), 레인스터 왕국(Leinster)과 같은 왕국들과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또한 아일랜드 왕국들 안에서도 지배권을 두고 군사적 충돌이 많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11세기에도 북아일랜드는 여러 작은 왕국들로 나누어진채 서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그중 울라드(Ulaid) 왕국이 가장 세력이 강했다. 남쪽에서는 아일랜드의 먼스트 왕국(978년 왕이됨)에서 브라이언 보루(Brien Boru) 왕이 아일랜드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여 1002년, 아일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브라이언 보루 왕은, 우이네일(Ui Neill) 왕조의 대왕, 말 세크나일(Mael Sechnaill)을 제압하고 아일랜드의 대왕(Ard Ri)으로 인정받았다. 브라이언 보루 대왕의 통치에 반대하였던 레인스터(Leinster) 왕국은 바이킹(더블린 왕국)과 동맹을 맺고 먼스트 왕국을 공격하였다. 브라이언 보루 대왕은 남 아일랜드 왕국들과 또한 일부 북아일랜 왕국들과도 동맹을 맺고 레인스터와 바이킹 연합군에 맞섰다. 이때 북아일랜드의 일부는 참전하였고 일부는 반대하였으며 일부는 중립을 지켰다. 참전한 북아일랜드 왕국들은 울라드 왕국(Ulaid)과 에어갈라(Eirgalach) 왕국이다. 이 두 세력은 1014년 4월 23일, 더블린 만 큰처의 클론타프 지역(클론타프 전투)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브라이언 보루 대왕이 이끄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전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바이킹 전사(브로다, Brodir)가 브라이언 보루 대왕의 텐트에 침입하여 대왕을 암살하였다. 브라이언 보루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무르하드(Murchad)가 왕위를 물려받지만 아일랜드는 여러 작은 왕국들로 다시 분열되었다. 클론타프 전투는 바이킹으로부터 아일랜드를 지켜낸 전쟁이었으며, 바이킹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전쟁이었다. 클론타프 전투에 중립을 지킨 울스터 지역의 왕국들은 여전히 북아일랜드에서 강한 세력이었으며 오닐 왕조가 통치하였던 티론 왕국(Tyrone, 혹은 디트 에오가인, Tir Eogain)과 오도넬 가문(우이네일 왕조 계열, Ui Neill)이 통치하였던 티르코날(Tir Conaill) 왕국들도 북아일랜드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2세기 중반의 북아일랜드는 맥로이 왕조(MacLochlainn)와 오닐 왕조(O Neill)가, 강한 세력(티론 왕국)으로 등장하였다. 맥로이 왕조는 우이네일 왕조의 계파로서 티르코날을 기반으로 형성된 왕국이며 1150년대 맥로이 왕조의 "미르케르타크 맥 로클라인(Muirchertach MacLochlainn)" 대왕은 아일랜드 전역을 지배하였던 강력한 대왕이 되었다. 우이네일 왕조의 계얼은 북아일랜드뿐 아니라 남쪽으로도 뻗어갔는데 바로 레인스터 왕국(디어못 맥 머로 왕, Dermot MacMurrough)이다. 레인스터 왕국의 맥 머로 왕은 맥 코클라인 왕에게 패권을 빼앗기자 다시 되찾고자 헨리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우이네일 왕조의 후손들은 북아일랜드와 남쪽 아일랜드 여러 지역에서 여러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서로 협력한 것이 아니라 지배권을 두고 경쟁하였다. 여기에다 맥로이 왕조는, 코나크트(Connacht) 왕국의 "루아이드리 우아 콘초바르(Ruaidri Ua Conchobair)"와도 지배권 다툼을 벌여야 했다. 결국 1166년, "루아이드리 우아 콘초바르 왕"이 아일랜드의 대왕에 오른다. 맥로이 왕조는 오래가지 못하고 북아일랜드는 오닐(O Neill) 왕조(티론 왕국)가 지배세력으로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레인스터 왕국의 디어못 맥 머로 왕의 요청으로, 1169년부터 헨리 2세의 명령으로 노르만이 아일랜드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리처드 디 클리프턴(Richard de Clare), 로저 드 몽모렌시(Roger de Montgomery) 등과 같은 노르만의 귀족들이 레인스터 왕국을 침략함으로서 디어못 맥 머로 왕은 왕국을 다시 되찾게 된다. 12세기 후반, 노르만은 아일랜드 동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북아일랜드로 침략을 확대하려 했다. 이때, 티론(오닐 왕조) 왕국과 티로코날(오도넬 왕조) 왕국이 헨리 2세에 맞서 싸웠다. 헨리 2세는 남쪽의 모든 아일랜드를 정복하여 영국의 통치를 강화하였으나 북아일랜드는 지속적으로 잉글랜드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1180년대부터 노르만은 타이론(Tyrone), 도니골(Donegal)과 같은 북아일랜드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13번째 왕이었던, 존 왕(John, 1199~1216년)의 통치 기간, 노르만은 아일랜드 대부분은 장악했지만 북아일랜드는 울스터(Ulster) 지역의 여러 왕국과 왕조들에 의해 고전을 하였다. 특히 우이네일 왕조(Ui Neill)를 중심으로 게일계(켈트족) 귀족들이 강하게 저항하였다. 1205년 존 왕은 휴 드 래이시(Hugh de Lacy)에게 통치권을 주어 울스터 백작령(Earldom of Ulster)을 설립하였다. 이때 많은 성과 요새들이 건설되었으며 울스터 지역의 지배권이 강화되었다. 울스터 지역의 여러 왕국들 오닐 왕조와 오도넬 왕조 그리고 우이네일 왕조는 노르만에 대항하며 겔릴라 전투를 통해 저지하려 노력했다. 울스터 백작령으로 인하여 13, 14세기에는 북 아일랜드에서 노르만의 영향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오닐 왕조와 오도넬 왕조의 끊임없는 저항으로 15세기에는 노르만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노르만의 지배가 약화되자 울스터 지역의 여러 왕조들은 서로 지배력을 두고 또 다시 대립하였다. 15세기의 북아일랜드 울스터 지역의 왕국들은 티론(오닐가문) 왕국, 로스 왕국(Ross, 오도넬 가문), 란리 왕국(Lannri)등이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하여 경쟁하며 전투를 벌였다. 16세기의 북아일랜드는 잉글랜드 20번째 왕, 헨리 8세(Henry 8, 1509~1547)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1, 23번째 여왕)로 인해 지배가 더욱 강화된 시기였다. 헨리 8세는 영국의 법과 제도를 아일랜드에 강요하였고 여기에 북아일랜드의 오닐 가문은 필립 오닐(Philip O`Neill) 왕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1598년 8월 14일, 울스터 지역의 황색 강(Blackwater River) 근처에서 잉글랜드 군대와 토마스 오닐(Thomas O`Neill)과 그의 사촌 오네일(O`Neill)이 이끄는 오닐 가문의 군대와 전투(바르도의 전투, Battle of the Yellow Ford)를 벌여 잉글랜드군을 격파하였다.
영국은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군사적 대응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17세기 영국은 울스터 지역에 영국 정착지를 세우려 시도하였다. 1603년,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을 울스터 지역에 정착하도록 유도함으로서 울스터 지역의 식민지화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많은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이 울스터에 정착하게 되었다. 개신교도들의 이주와 정착으로 울스터 지역의 카톨릭 주민들은 사회적,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다 결국 1641년,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반란은 1642년, 찰스 1세의 통치때 일어난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영국 내전(1642~1651년)과도 연결된다. 의회파를 이끌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장군의 승리로 찰스 1세는 반역죄로 처형(1549년)되었고 영국은 공화국(Commonwealth)으로 전환되었으며 크롬웰 장군은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올라 영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크롬웰의 통치아래 카톨릭 주민들은 더욱 억압을 받아, 추방되거나 살해당하게 된다. 1658년, 크롬웰이 죽게되고 공화국은 다시 해체되었으며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왕정 복고 이후에도 카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은 지속되었고 영국 정부는 개신교에 대한 지원 정책을 유지하였다. 그러면서 1668년, 영국에서는 명예 혁명(Glorious Revolution)이 일어났다. 제임스 2세(카톨릭 신자)는 카톨릭 신자들만 중용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여기에 개신교도들이 반대하였다. 개신교도들은 네델란드의 윌리엄 오프 오렌지(William of Orange)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는 군대를 이끌고 1688년 11월, 잉글랜드로 진입하였다. 이때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주하였고 윌리엄 오프 오렌지(윌리엄 3세)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2세와 결혼한 후 함께 공동으로 영국의 군주가 되었다. 이것은 전쟁없이 평화롭게 이루어졌으며 1689년, 윌리엄은 권리장전(Bill of Rights, 영국헌장)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은 의회의 권력이 강화되고 군주의 권력이 제한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1690년 7월 1일 프랑스로 도주한 제임스 2세가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아일랜드는 카톨릭이 다수였기에 카톨릭 귀족들을 규합하여 왕권을 되찾으려 했다. 반면 개신교도들은 윌리엄 3세를 지지하였으며 이 두 세력은 1690년, 보이니 강 근처에서 대규모 전투(보이니 전투, Battle of the Boyne)를 치루게 된다. 이 전투에서 제임스 2세는 다시 패전하게 되어 프랑스로 재차 망령하게 된다. 1691년, 보이니 전투 후 리머릭 조약(Treaty of Limerick)이 체결되어 겉으로는 카톨릭 신자들에 대한 관용이 약속되었지만 실제는 카톨릭 탄압법(Penal Laws, 패널법)이 제정되어 북아일랜드 뿐아니라 아일랜드 전역에서 카톨릭의 정치적 권한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법으로 카톨릭 신자들은 토지와 재산의 소유가 금지되었고 공직 진출도, 교육도 모두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 1700년 초, 대규모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이 이주하여 정착함으로 북아일랜드의 울스터 지역 개신교 인구 비율이 증가하였고 개신교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더욱 강해졌다. 1798년, 카톨릭과 개신교 등 종교를 초월한, 아일랜드 연합인(Irish United Irishmen)이라는 혁명 단체가 결성되었다. 특히 북아일랜드 울스터 지역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됨으로서 영국에 대한 대대적 반란으로 이어졌지만 곧 영국 군에게 진압되었다. 이 반란 이후 영국은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1801년 연합법(Acts of Union)을 통과 시켰다. 이 법에 따라 아일랜드 의회는 폐지되었고 아일랜드는 영국에 통합되었으며 그레이크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여전히 차별을 받게되었으며 이것은 독립 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19세기 초,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억압 받던 카톨릭 신자들이 다니엘 오코넬(Daniel O`Connell)의 지도하에 카톨릭 해방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였고 이로 인하여 영국은 1829년 카톨릭 해방법(Catholic Emancipation Act)을 통과시킴으로서 카톨릭 신자들은 공직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정치적 차별도 완화되었다. 여기에 대해 북아일랜드 개신교 공동체는 강하게 반발을 하였다. 1845년부터 1852년에는 아일랜드 전역이 감자로 인한 역병과 대 기근으로 100만명이 넘게 굶어 죽었고 1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 북아일랜드 울스터 지역의 사람들도 미국과 캐나다, 호주 등지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하였다. 19세기 후반, 북아일랜드 울스터 지역은 영국의 산업 혁명과 함께 급속히 발전하고 성장하게 된다. 섬유 산업, 조선업과 선박 산업, 공학 등 다양한 산업이 발전하면서 벨파스트는 아일랜드의 중요하고 부유한 산업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19세기 후반, 남부 아일랜드에서는 자치권을 두고 카톨릭 교도들의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869년, 북아일랜드의 주요 도시중 하나였던 "런던데리(Derry)"에서 카톨릭과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개신교가 주류였던 북아일랜드에서 카톨릭 신자들은 하층민으로 전락된채 차별을 받고 있었고 남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카톨릭 교도들의 민족주의 영향을 받고 북아일랜드에서도 카톨릭 교도들이 폭동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도들과의 충돌로 이어졌으며 아일랜드 분리와 독립 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914년, 아일랜드 자치법이 제정되었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자치권 부여가 연기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1916년 4월 24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영국에 대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날이 부활절이라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라고도 한다. 이들은 더블린의 주요 건물을 점거하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러나 결국 영국군에게 진압되었다. 이때부터 1921년까지 아일랜드는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 전쟁을 벌이게 된다. 1917년, 아일랜드 공화국 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은 무장투쟁을 시작하였고 1818년, 아일랜드 민족당이 총선에 대승함으로서 독립의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무장 투쟁과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영국은 1921년 잉글랜드 - 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하여 아일랜드에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아일랜드는 자유국(Irish Free State, 1922년)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카톨릭 교도들이 많았던 남부 아일랜드 26개주는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하였지만, 개신교 교도들이 많았던 북아일랜드 6개 주는 영국령으로 남게된다. 1921년, 북아일랜드는 자치정부를 수립하여 벨파스트를 수도로 정하고 자치권을 행사하며 북아일랜드를 통치하였다. 1960년대 후반, 북아일랜드 카톨릭 신자들은 그들의 권리, 주택, 고용, 선거제도의 차별을 철폐하고자 카톨릭 공동체 민권 운동(Civil Rights Movement)을 전개하였다. 1968년, 카톨릭 민권 운동가들은 평화적으로 시위를 시작했지만 경찰과 충돌하면서 폭력 사태로 변하게 되었다. 이때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다시 재결성되어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공화국군은 주로 카톨릭 신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영국과 친영국 세력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영국과의 통합을 지지하였던 개신교에서는 얼스터 지원군(UVF)를 창설하여 무장하였고 공화국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1972년 1월, 북아일랜드 "런던데리"에서 평화적 시위를 하던 카톨릭 신자들에게 영국군이 발포하여 13명이 사망하게 된다(블러디 선데이, Bloody Sunday, 1972). 1970년, 1980년대는 북아일랜드의 IRA, UVF 같은 무장 단체들로 인하여 테러, 폭탄 공격, 암살 등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수천명이 사망하는 내전 상태였다(북아일랜드 분쟁). 1990년 중반, 이 분쟁을 끝내기 위해서 북아일랜드의 여러 정치 세력들과 영국이 벨파스트 협정(굿프라이데이 협정, 1998)을 체결하게 된다. 북아일랜드의 자치 정부를 다시 구성하고 모든 무장 단체들의 무기 반납과 해체에 대한 내용이며 동시에 남부 아일랜드와의 통일 여부를 결정하는 권리도 부여했다. 벨파스트 협정은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온 중요한 협정이었다. 현재 북아일랜드는 영국의 자치 정부아래 운영되며 종교적 분쟁과 정치적 환경은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다.
- 북아일랜드의 정치
북아일랜드의 정치 체계는 장관제(Ministerial System)이며 이것은 권력 분점(power-sharing)에 기반을 둔 체계로서 개신교도의 연합주의와 카톨릭의 민족주의 및 여러 정당들이 참여하는 정부 구성 방식이다. 북 아일랜드 최고 통치자는 제 1장관(First Minister)이며 부제 1 장관(Deputy First Minister)이다. 이 두 장관은 민족주의(카톨릭)와 연합주의(개신교)의 정당에서 선출되며 두 장관은 동등한 지위와 권한을 가진다. 부제 1 장관은 제 1 장관과 함께 자치 정부를 운영하며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한다. 이 두 장관은 서로 협력관계이며 권력을 분점하는 관계로서 둘 중 하나가 사임하거나 제대로 정부를 운영하지 못할때는 나머지 장관도 물러나야 한다. 따라서 이것은 공동 통치의 상징이며 권력 분점 체제의 상징이다. 집행부(Executive)는 의회에서 선출된 장관들로 구성되며 각 장관은 교육, 보건, 인프라 등 다양한 분야의 정책을 실행한다. 집행부는 도혼트 방식(D`Hondt method)에 따른 각 정당의 의석 비율에 따라 장관직을 배분 한다. 의회는 90석이며 비례대표로 선출된다. 주요 정당에는 민주 연합당(DUP), 신페인(Sinn Fein), 사회민주노동당(SDLP), 얼스터연합당(UUP), 동맹당(Alliance Party) 등이 있다. 권력 분점으로 북아일랜드 정치는 늘 불안하다. 여러번 정단 간의 이견으로 자치정부가 마비되었으며 제 1장관과 부제 1장관이 협력하지 않으면 정부와 의회는 제대로 가동하지 못한다.
- 북아일랜드의 경제
북아일랜드 경제는 전통적으로 제조업과 농업에 기반을 두었지만 최근에는 공공부문, 교육, 의료, 기술, 영화, 금융 등과 같은 서비스 산업, 관광업이 성장하고 있다. 북아일랜드의 제조업은 선박 건조, 섬유산업이 발달되었지만 최근에는 농식품 가공, 의약품, 첨단 기술, 항공 우주로 전환되고 있다. 비옥한 토지로 인해 낙농업, 축산업, 곡물생산 등 농업도 발달하였으며 EU 국가들과 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23년 기준, 북아일랜드의 GDP는 약 700억 달러이며 이것은 영국 경제의 2.5% 규모로서, 영국을 이루는 4개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중 가장 작은 경제 규모이다.
- 북아일랜드의 교육
북아일랜드의 교육은 독자적 교육 제도로 구성되며 초등교육, 중등교육, 종교 교육, 고등교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5세부터 7년간 초등 교육을 통해 기초적 학습 능력을 습득하고, 중학교 과정은 중등학교와 종합 학교로 구성된다. 중학교는 11세부터 18세까지이며 성적에 따라 중학교에 진학 할 수 있다. 북아일랜드는 카톨릭과 개신교로 이루어져 학교 또한 종교 공동체로서 종교 교육도 진행된다. 최근에는 종교에 관계없이 교육에 전념하는 통합 학교(Integrated Schools)가 설립되고 있다. 중등학교 학생들은 만 16세에 GCSE(General Certificate of Secondary Education) 시험을 통해 평가를 받으며 이 성적은 고등 교육의 진학에 중요하다. GCSE 과정 이후 고등 교육 진학을 위해 A-레벨(Advanced Level) 과정을 선택하게 되며 이것은 대학 입학에 중요한 자격증이다. 북아일랜드에는 퀸스 대학교 벨파스트(Queen`s University Belfast)와 울스터 대학교(Ulster University)가 있다. 이 두 대학은 북아일랜드의 중요한 고등교육의 거점이다. 북아일랜드 학생들은 영국과 아일랜드 공화국의 다른 대학으로도 자유롭게 지원 할 수 있다.
3. 북아일랜드 유적지와 자연 경관
- 북아일랜드의 유적지
북아일랜드의 가장 유명한 유적지는 자이언츠 코즈웨이(Giant`s Causeway)이며 4만개의 육각형 현무암기둥들이 바다로 뻗어있다. 카릭어리드 밸리(Carrick-a-Rede Rope Bridge)는 연어를 잡기위하여 절벽위에 설치한 다리이다. 던루스 성(Dunluce Castle)은 13세기 북해안 절벽 위에 세워진 중세의 성이다. 벨파스트 성(Belfast Castle)은 19세기에 재건된 성으로서 벨파스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다. 힐스보로 성(Hillsborough Castle)은 18세기에 건축된 영국 왕실의 북아일랜드 공
식 거처로 사용된 성이다.
- 북아일랜드의 자연 경관
모운 산맥(Mourne Mountains)은 북아일랜드 남동부에 위치하여 슬리브 도널드(Slieve Donard) 산이 있다. 로우네이(Lough Neagh)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을 걸쳐있는 호수로서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글렌즈오브 안트림(Glens of Antrim)은 9개의 깊은 계곡으로 이루어진
북 아일랜드의 가장 아름다운 곳이며 깊은 협곡, 푸른 들판, 시골 마을들이 어우러져 있다. 스트랭포드 로우(Strangford Lough)는 북아일랜드 동부에 위치한 큰 바다 호수이며 해양 보호 구역이다. 다크 헤지스(The Dark Hedges)는 특이한 나무들이 길을 덮고 있으며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해(Irish Sea), 북해(North Sea), 대서양(Atlantic Ocean) 등 바다로 둘러쌓여 경관이 빼어나다. 북아일랜드의 총 해안선 길이는 약 1,620km이며
북쪽은 안트림 해안(Antrim)으로서 유명한 절벽과 자이언츠 코즈웨이(Giant`s Causeway)와 특이한 기둥 모양의 바위로 유명하다. 서쪽 해안은 로크네이(Lough Neagh)와 로크 에린(Lough Erne) 등 큰 호수와 경계를 이루며, 남쪽 해안은 아이리시해(Irish Sea)에 접해있으며 여러 만과 해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동쪽 해안은 벨파스트 항구(Belfast Harbour)가 있으며 이곳은 해상 교통의 중심지이다. 이처럼 북아일랜드는 고대, 중세의 성들과 유적지들, 그리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있는 곳들이 많다.
북아일랜드는 산맥, 호수, 계곡, 들판, 해안선과 해양등 아름답고 다양한 지형과 생태계를 자랑하며 북아일랜드 사람들과 잉글랜드의 문화가 섞여진 독특한 전통과 음악, 예술, 요리, 축제들로도 유명하다. 또한 울스터 서사시의 나라 답게, 고대 켈트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역사와 종교적, 정치적 갈등이 중세와 근대와 현대까지 이어져왔다. 최근 몇 년 동안 평화와 통합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