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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웨일스, 아스왕의 전설을 가진 나라

by 돌야dolya100 2024. 10. 4.

웨일스는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스코틀랜드와 함께 영국을 구성하는 국가로서 웨일스(Wales)의 정식 명칭은 웨일스와 서부 앵글리아의 왕국(Wales and the Kingdom of West Anglia), 또는 웨일스 자치 정부(Welsh Government), 또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이라 하며 간단히 웨일스라 한다. 

웨일스라는 이름은 우리 동족, 우리 형제라는 뜻을 가진 고대 웨일스어(켈트어)의 "컴리(Cymru)"에서 유래하였다. B.C.1세기부터 A.D.5세기까지, 웨일스를 고대 로마 사람들은 브리타니아(Britannia)라고 불렀으며 이 지역의 다양한 부족들 중 일부를 로마인들은 킴리(Cymry)라 불렀다. 이것을 켈트족은, 웨일어로 동포, 형제라는 의미의 컴리(Cymru)라 부르게 되었다. 이 이름에는 웨일스 사람들이 그들의 공동체와 문화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웨일스 인들은 축구, 럭비 같은 스포츠에서도 강한 단결력을 보여주는 강하고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있다. 따라서 Cymru는 웨일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름으로서, 웨일스의 국가 Hen Wlad Fy Nhadau(우리 아버지의 땅)에도 웨일스 사람들의 정체성을 잘 표현하였다. 앵글로 색슨족이 켈트족을 가키릴때 사용한 영어 이름은 외부 사람들, 또는 이방인이라는 의미의 "위일러스(Wealas)"이며, 이것이 지금의 웨일스(Wales)로 변하여 자리잡았다. 따라서 영어의 웨일스는 앵글로색슨족이 켈트족을 바라보는 외부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부른 이름이다. 영어의 웨일스는 역사적으로 앵글로색슨족과 켈트족의 관계가 반영된 이름으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웨일스의 언어는 주로 웨일스어(Cymraeg, 켈트어 계열)와 영어이다. 웨일스어는 고대 로마시대, 고대 브리튼어에서 사용되고 발전하여 웨일스 지역의 토착 언어가 되었다(약1,500년의 역사). 웨일스어는 웨일스의 공식 언어로서 공공기관, 및 교육 시스템 등에 사용되며 정부는 웨일스어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웨일스는 웨일스어와 함께 영어도 널리 사용한다. 교육, 공공기관 등 모두 웨일스어와 영어가 사용된다.

웨일스 지도웨일스 아스왕의 전설
웨일스 지도 웨일스 아스왕의 전설

1. 웨일스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웨일스의 영토와 수도

웨일스는 영국을 구성하는 네 개의 나라 중 하나로서 그레이트 브리튼 섬의 남서부에 위치한다. 총 면적은 20,779 제곱킬로미터으로서 영국을 구성하는 네 나라 중 세번째로 큰 나라이다. 동쪽은 잉글랜드와 접하고, 서북쪽은 대서양과 카르디프만을 접하고, 남쪽은 브리스톨만에 접한다. 웨일스의 수도는 카디프(Cardiff)이며 면적은 140.3 제곱킬로미터, 2023년 기준 인구는 약 37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 카디프는 웨일스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 웨일스의 인구와 인종

웨일스의 인구는 2023년 기준, 320만명이며 인구 비율은 백인이 93%, 아시아계 4%, 흑인과 혼혈 및 기타가 3%를 차지한다. 

 

2. 웨일스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웨일스의 역사

웨일스의 역사는 고대와 중세, 근대와 현대로 나눌수 있다. 브리튼 섬의 역사는 B.C.3천년경, 여러 다양한 민족이 정착 함으로서 시작되었으며  B.C.800년경에는 켈트족이 대거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서 켈트족을 브리튼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B.C. 55년부터 브리튼 섬은 로마의 지배권이 미치기 시작하였고 B.C.43년에는 로마 제국의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명령으로 브리튼 섬을 침략하여 A.D.1세기까지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게된다. 로마의 식민지 아래에서 웨일스의 카르마르텐(Carmarthen)과 카스트리움(Caerleon)은 크게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상업과 군사적 요충지로 성장하였다. 이 기간에 로마의 건축 양식, 법률과 문화가 웨일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5세기 초, 로마는 내전과 전쟁의 피로감으로 제국의 국력이 점점 약해졌으며 로마 군대는 브리튼 섬에 대한 지배권을 잃고 철수 하게되었고 웨일스는 다시 독립적 자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웨일스에는 고르리 왕국(Kingdom of Gwent), 카디프 왕국(Kingdom of Cardiff), 웨네드 왕국(Kingdom of Gwynedd), 데이르 왕국(Kingdom of Deheubarth), 포우이스 왕국(Kingdom of Powys)  등 여러 켈트족 왕국들이 형성된다. 웨일스의 고대 왕국들이 형성될 시기는 "아서 왕(King Arthur)"의 전설로도 유명하다. 아서왕은 신화적 인물이지만 최초의 전설은, 5세기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5세기는 로마 제국의 쇠퇴와 브리튼 섬의 여러 켈트족 왕국이 등장하였던 시기로서 실제로 아서왕이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아서왕의 전설의 기초가 형성된 시기로 보여진다. 아서왕의 전설은 9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다양한 문헌을 통해 발전하게 된다. 로마가 철수 한, 5세기 초부터 스칸디나비아 반도(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지역의 "앵글로 색슨족(Anglo-Saxons)"이 브리튼 섬으로 이주하여 머시아, 앵글랜드, 노섬브리아와 같은 여러 왕국들을 세웠다. 이후 앵글로 색슨족은 브리튼족(켈트족)과 전투를 벌이며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여러전투에서 결국 브리튼 족이 밀려나게 되었고 6세기 초, 앵글로 색슨족이 브리튼 섬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따라서 브리튼 족은 지금의 웨일스, 스코틀랜드 등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6세기에는 캔터베리 왕국(Kingdom of Ceredigion), 미드가리아 왕국(Kingdom of Gwynedd), 포이우스 왕국(Kingdom of Powys), 데이르 왕국(Kingdom of Deheubarth), 뎀레드 왕국(Kingdom of Demetia), 레그이넥 왕국(Kingdom of Reged), 가울 왕국(Kingdom of Gower), 고윈네드 왕국(Kingdom of Gwynedd) 등이 존재하였으며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동맹을 맺으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 시기에 여러 기독교 선교사들이 웨일스에 기독교를 전파하게 되었으며 대표적인 인물은 다비드(Saint David)로서 웨일스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하였던 인물이다. 6세기와 7세기에는 웨일스의 여러 왕국들이 서로 경쟁하면서도 밖으로는 앵글로 색슨족과도 전투를 치루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윈 네드 왕국과 레그이넥 왕국이 강력하게 세력을 확장하여 다른 왕국들을 통합하려고 시도하였다. 특히 고윈 네드 왕국에는 카디널 아우엘(Cadwaladr)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왕)가 나타나서 웨일스의 중요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8세기에도 이들 왕국들은 서로 경쟁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8세기의 웨일스의 왕국들은 고윈네드 왕국(Kingdom of Gwynedd), 포이우스 왕국(Kingdom of Powys), 뎀레드 왕국(Kingdom of Demetia), 레그이넥 왕국(Kingdom of Reged), 데이르 왕국(Kingdom of Deheubarth), 가울 왕국(Kingdom of Gower), 칼리도니아 왕국(Kingdom of Caledonia)등 여러 왕국들의 분열과 대립은 계속되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고윈 네드 왕국은 카디널 아우엘의 후손들에 의하여 계

웨일스 카펠리 성

속 영토와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8세기 중반부터는 앵글로 색슨족의 침략 뿐 아니라 바이킹들의 침략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웨일스의 왕국들은 일시나마 동맹을 맺고 외부 공격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9세기로 접어들면서 고윈네드 왕국과 포우이스 왕국, 데이르 왕국들은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해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이들 중 고윈 네드 왕국에서는 "룰리의 애드워드(Rhodri the Great)" 왕의 강력한 통치로 인하여 더욱 크고 강력하게 성장하게 된다. 룰리의 애드워드 왕은 뎀레드 왕국, 레그이넥 왕국, 가울 왕국을 등 여러 왕국을 통합하고 앵글로 색슨족과 바이킹으로부터 웨일스를 방어해 나갔다. 9세기 중반,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비롯한 브리튼섬 전체에 노르만의 침략이 이루어졌고 웨일스의 고윈네드 왕국과 포이우스 왕국은 동맹을 맺고 싸웠다. 9세기 말까지 노르만의 침략은 계속되었으며 웨일스의 왕국들은 계속되는 내전과 전투로 자기 영역을 지키기에 바빴다. 10세기는 고윈네드 왕국에서는 러드리 아흐바드(Rhodri`sGrandson, 10세기 초), 하웰 다(Hywel Day, 10세기 중반, 880~950년) 같은 강력한 왕들의 등장으로 웨일스에서 가장 강한 왕국으로 자리 잡게된다. "하웰 다"는 웨일스 남부의 "디헤우바르트 왕국"의 왕이었으며 하웰 후엘(Hywel Dda), "하웰 대왕","현명한 하웰"이라고도 불렸는데 그는 중세 웨일스의 군주들 중 한 명으로서 웨일스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하웰 대왕은 포이우스 왕국과 레그이넥 왕국과의 정략 결혼을 통하여 지배권을 넓혔으며 이런 그의 지혜와 강력한 지도력으로 웨일스를 통합해 나갔다. 이러한 통합으로 하웰 대왕의 위치는 웨일스의 여러 군주들중 탁월하고 독보적 위치에 있게 되었다. 하웰 대왕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웨일스를 통합하고 법을 제정한 군주였다는 점이다. 928년, 하웰 대왕은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모든 법들을 정리하여 새롭게 개정하는 법률 회의를 열어 새로운 법 체계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하웰의 법(Cyfraith Hywel)"이라 한다(교회법을 참조한 것). 이 법에는 재산 상속, 결혼, 여성에 대한 권리와 여성의 재산 상속, 범죄에 대한 처벌 등 여러 명확한 규정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하웰의 법"을 제정하여 웨일스 전체에 표준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하웰의 노력과 그의 명성은 웨일스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그의 통치속에 웨일스가 정치적으로 잠시 안정을 누렸던 웨일스가 통합된 시기였다. 하웰의 법은, 하웰 대왕의 죽음 이후에도 여러 수세기 동안 웨일스 전 지역에서 13세기까지 사용되고 유지되었다. 하웰은 기독교인으로 웨일스 왕들 중 첫 번째로 로마를 순례하였으며 웨일스에 기독교가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웰 대왕의 통치때도웨일스의 해안을 따라 바이킹의 침략이 있었지만 바이킹과 상업적으로, 또한 외교적으로 협상을 통해 평화롭게 관계를 구축하여 비교적 바이킹의 침략이 크게 줄었다. 동시에 하웰 대왕은 앵글로 색슨족(잉글랜드)과도 평화를 추진하여 웨식스 왕국의 애설스탄(Athelstan, 927년 잉글랜드를 통일한 왕)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11세기의 웨일스에는 남부 지역에서 기브르 왕국(Glywysing)과 아몬 왕국(Amon) 세워졌고 고윈네드, 포이우스, 데이르 왕국들도 건재하게 버티고 있었다. 1063년, 하웰 대왕의 "디헤우바르트 왕국(지금의 카디프, 스완지)"은 노르만의 침략으로 힘을 잃게되었고 그리프드 리드(Gruffydd ap Llywelyn)에 의하여 정복된 후 노르만에 의해 분할되었다. 1066년, 잉글랜드 앵글로색슨족을 정복한 노르만의 윌리엄 1세(William, 윌리엄 노르망디, William of Normandy)는 잉글랜드의 첫번째 노르만 왕이 되었다. 잉글랜드를 정복한 그는 웨일스를 공격하였고 웨일스의 여러 왕국들은 이에 맞서기 위하여 동맹을 맺고 대항하였다. 1070년대 초, 윌리엄은 웨일스의 여러 왕국들을 공격하였는데 주로 고윈네드 왕국과 포이우스 왕국과 전투를 치루었다. 이 전투는 1072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웨일스의 저항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087년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ror)이 죽은 후에도 노르만 군대는 계속해서 웨일스를 공격하였다. 웨일스는 고원지역의 험한 지형과 잘 훈련된 전사들로 인하여 노르만과 게르만에 맞서 잘 저항할 수 있었다. 12세기에도 노르만의 침략은 계속되었으며 주로 하르드리 왕국(Harold Kingdom), 포우이스 왕국(Powys), 고윈네드 왕국(Gwynedd)의 저항에 부디쳤다. 이때 고윈네드 왕국의 "리슬리의 데이비드(Llywelyn the Great, 1195~1240년)"는 여러 왕국과 동맹을 맺고 동합을 시도하였으며 노르만에 맞서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리슬리의 데이비드의 통치아래 노르만 군대와 전투를 치루며 고윈네드 왕국은 웨일스에서 가장 강한 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노르만과 싸워야 하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포우이스, 데이르, 고윈네드왕국들은 영토를 두고 서로 전투를 치루어야 했다. 12세기 중반, 잉글랜드의 헨리 2세(Henry 2)는, 영토 확장과 권력 강화를 위하여 웨일스를 침략하였다. 1157년, 헨리 2세는 고윈네드 왕국을 공격하였다. 고윈네드 왕국의 왕 리슬리이 데이비드는 웨일스의 여러 왕국을 통합하려고 시도하며, 또 웨일스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하여  헨리 2세에 맞섰다. 강력한 저항에 부디친 헨리 2세는 군사를 물린후 1165년 2차 침략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리스리의 데이비드"의 강력한 저항으로 또다시 좌절되었다. 13세기에도 노르만의 침략은 계속이어졌다. 리슬리의 데이비드 죽음 후 그의 손자 리슬리 2세(Llywelyn ap Gruffudd)가 고윈네드 왕국의 왕이 되었다. 1258년, 리슬리 2세는 웨일스의 모든 왕들에게 권위를 인정받고 웨일스의 독립성을 위해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의, 헨리 3세의 노르만 군대를 잘 막아냈다. 1277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다시 침략하였고 리슬리 2세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웨일스의 많은 지역이 잉글랜드에 정복당하였고 잉글랜드 왕국으로 병합되었다. 웨일스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카르마르텐, 콘위, 베르겐 등 여러 성을 건축하여 웨일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1348년, 흑사병(Black Death)이 웨일스에도 도착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되었다. 14세기말, 잉글랜드 귀족들의 강압적인 통치로 인하여  웨일스는 불만과 저항의식이 강력하게 일어나 반란으로 이어졌다. 웨일스의 귀족이었던 오와인 글린두르(Owain Glyndwr)는 자신을 웨일스의 왕으로 선포하며 독립을 위하여 잉글랜드에 맞섰다. 1400년 초에 시작된 이 독립 투쟁은은 5년 동안 여러 성과 도시를 점령하고, 프랑스와 동맹도 맺으며 외교적 지원도 받으면서 이루어졌지만 1405년 이후 독립군 세력이 점차 약해지졌고, 잉글랜드의 헨리 4세(Henry 4)와 헨리 5세(Henry 5)의 공격을 받게된다. 1415년, 결국 독립군은 잉글랜드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오와인 글린두르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후 웨일스의 귀족들은 잉글랜드 체제에 통합되었고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강력한 통치를 받게되었다. 

1455년, 요크 가문(하얀 장미)과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 상징)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 문제로 내전이 일어나 32년 동안(1487년까지) 지속된다. 이 두 가문은 각각 하얀 장미와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사용하였기에 이것을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이라 한다. 장미 전쟁은 웨일스 안에서도 영향을 받게되어 요크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과 랜커스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 충돌하게 되었다. 웨일스의 귀족들은 각기 다른 가문에 충성하여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였기에 어느 집안이 이기느냐에 따라 웨일스 귀족들의 운명도 달라졌다. 결국 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Henry Tudor, 헨리 7세)"가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Richard 3, 요크가문의 세번째 왕, 잉글랜드 26번째 왕)를 "보스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 1485년 8월 22일)"에서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면서 118년의 장미 전쟁도 끝이난다. 헨리 7세는 1485년부터 1509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왕이었으며 튜더 왕조의 창립자로서 웨일스의 튜더 가문 출신이다. 헨리 7세의 통치 기간, 웨일스는 잉글랜드와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일부가 되었고 또한 "웨일스 법"을 제정하여 법적 통합도 강화했다. 헨리 7세의 사후, 헨리 8세의 재위 기간 웨일스 법이 제정되었다. 1535년, 첫 번째 웨일스 법이 제정됨으로서 웨일스는 공식적으로 일글랜드로 병합되었고 웨일스의 법률과 행정 모두 앵글랜드의 법에 따라야 했다. 웨일스 의회는 해체되어 잉글랜드로 편입되었으며 모든 법률도 영어로 작성되어야 했다. 1542년, 두번째 웨일스법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첫번째 법을 보완한 것으로서 웨일스의 귀족들과 지방 자치 단체의 권한에 대한 것들로서 웨일스를 보다 확실하고 잘 병합하기 위한 조치들이 포함되었다.  이 두 법률 제정은 웨일스와 잉글랜드의 법적 통합을 이루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웨일스가 잉글랜드와 통합하는 과정에서 웨일스에는 개신교가 점차 확산되었다. 그것은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여 로마 카톨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영국 국교회(성교회)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웨일스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웨일스어로 성경이 번역(웨일스 성경, Bible in Welsh)되었고 웨일스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되었다. 이로인하여 웨일스에 남아있던 카톨릭 신자들은 개신교의 확산에 반발하여 종교 분쟁이 일어났다. 1549년, 잉글랜드는 개신교적 "기도문(제 2차 공기도서, Book of Common Prayer)"을 강제 시행하였고 이것은 카톨릭 신자들의 "웨일스 반란(Prayer Book Rebellion, 무장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으며 이 여파로 개신교는 웨일스 전역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1550년대,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서 1세의 통치아래 개신교가 더욱 부흥되고 확산되었으며 동시에 웨일스에 대한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1542년에 발표된 "웨일스 법"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통합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법과 정책은 웨일스를 차별하였고 웨일스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였기에 불만이 쌓였고 이것은 곧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 1575년, 잉글랜드의 억압과 과중한 세금 부담에 대한 반발로, 웨일스는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카톨릭 귀족들과 민중들이 헤르포드 근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전투(헤르포드 전투, Battle of Hereford)로 이어졌지만 잉글랜드 군에 진압되었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계속 반란이 여러차례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1580년, 사이먼 리지어 반란(Simon of Hainault), 1584년, 스노도니아 반란(Snowdonia Rebellion), 1596년의 코니 반란(Kony Rebellion) 등, 이러한 반란은 모두 경제적 어려움과 억압적 통치, 과다한 세금 징수로 인하여 생겨난 반란들이며 모두 잉글랜드 군대에 진압되어 실패하였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1)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찰스 1세의 통치는 권위주의적이었으며 이것은 의회와의 갈등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로인해 1629년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것은 결국,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져 내전(1642~1651년)으로 발전하게 된다. 주로 왕당파를 지지하였던 웨일스의 귀족들은 왕당파에 충성하며 군대를 조직하였다. 웨일스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직접적 갈등의 중심지가 되어 웨일스의 여러 지역에서 극렬한 전투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전투들은, 1644년 몽고메리 전투(Battle of Montgomery), 1645년의 마킨 전투(Battle of Naseby)가 있으며 이 전투들, 모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장군이 이끄는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이 전쟁으로 웨일스의, 의회파의 세력이 강력해졌으며 웨일스의 권력을 의회파가 장악하게 된다. 1653년, 크롬웰 장군은 호국경(보호자, Lord Protector)으로 취임한 후 웨일스에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치를 실시하였다. 1658년, 크롬웰의 죽음으로 공화국은 다시 해체되었고, 1660년, 찰스 2세가 즉위하여 왕정 복고가 이루어짐으로서 웨일스는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긴장이 재연되었다. 이후 웨일스는 왕당파가 다시 권력을 잡게 됨으로서 웨일스 내에서 자치권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일어났다. 그러면서 웨일스는 18세기로 넘어가면서 산업 혁명을 경험한다. 석탄과 철강 산업이 빠르게 발전하게 되었고 산업화로 인하여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었다. 그러면서 남 웨일스 지역에는 카디프, 스완지, 포트 태알과 같은 대 도시들이 형성되었고 이들 도신들은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산업화로 인하여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었으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요구와 다양한 사회적 운동이 전개되었다. 18세기에는 웨일스 침례교와 웨일스 연합교회가 웨일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회적 개혁과 교육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이시기에 웨일스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웨일스어(켈트어)로 문학, 음악, 민족 문화등이 발전하여 웨일스의 정체성이 더욱 강화되었고 독립에 대한 의지가 더욱 확고히 자리잡게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19세기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부각되었다. 웨일스의 문화와 역사를 지키자는 운동과 함께 웨일스 민족주의당(Plaid Cymru)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19세기의 웨일스 문화는 민족주의와 결합되어 음악과 문학에서 더욱 발전하였으며 이것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긴 노동 시간, 낮은 임금으로 인하여 노동 조건과 임금 인상, 노동 시간의 단축 등을 요구하며 파업과 집회를 통해 여러 노동 조합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31년 3월, 리시(Llanymynech)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리시의 반란(Luddite Riots)은 19세기에 일어난 노동자들의 반란 중 하나로서 기계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기계로 인하여 일자리를 잃을까, 염려했던 노동자들이 반감을 가지고 일어난 반란이다.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고 폭력 시위를 통해 공장들을 습격하였으며 이것은 곧 급속하게 확산되었으며 정부는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832년, 웨일스의 개혁법(Reform Act 1832)이 제정되었다. 웨일스는 산업화의 영향으로 부유한 계층이 정치적 권한을 독점였고 노동자들과 저소득층은 정치적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느낀데 대한 반발로 제정된 개혁법이었다. 이 법으로 유권자 자격이 완화되었고 노동자와 중산층 등에게도 투표권이 공평하게 부여되었다. 이 개혁법으로 웨일스의 많은 주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것은 자치권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이어진 1차 세계 대전에, 웨일스 군인들은 약 40만명이 참전하였고 이중 10만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전쟁 동안은 무기와 군수품 생산이 급증하여 웨일스 산업이 침체되지는 않았지만 종전 후에는 경제적 불황이 닥치게 되었고 귀환한 군인들과 국민들은 사회적 권리와 정치적 자치권을 요구하며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등에업고 1921년 웨일스는 자치 정부를 위한 의회 법안이 잉글랜드 의회에 제출되었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세계 1차 대전의 여파는 곧 미국의 대 공황으로 이어졌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된 세계 대 공황(Great Depression)의 여파로 웨일스의 석탄 산업도 크게 타격을 받고 쇠퇴하게 된다. 이것은 대 공황의 여파로 국제적 경기 침체의 결과 석탄 수요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웨일스의 석탄 산업을 침체시켰으며 이때 많은 광산이 폐쇄되었고 실업률이 크게 증가하였다. 이로써 웨일스는 산업의 다각화에 초점을 맞추어 기계, 화학, 전자 산업 등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고 발전시키게 된다. 대 공황이 끝나갈 무렵인, 1939년부터~1945년사이 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웨일스는 카디프와 스완시가, 해군 군사기지로 사용되었으며 여러 군사 훈련 및 작전이 웨일스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관계로 웨일스의 여러 도시들은 공습을 받고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경제와 산업도 크게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전쟁 기간, 군수 산업으로 겨우 경제는 명목을 유지하였지만 종전 후 복구와 재건은 경제력의 한계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정치적 불만으로 또다시 웨일스 자치 정부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2차 세게 대전의 종전과 함께 1945년, 잉글랜드의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함으로서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총리의, 정부가 세워졌다. 웨일스에서도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은 1950년대와 1960년, 1970년대까지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이로인해 웨일스 자치 정부에 대한 요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웨일스는 민족주의당(Plaid Cymru)의 지지가 증가하면서 1974년, 총선에서는 민족주의 당의, 의석이 몇몇 채워졌다. 1979년에는 웨일스 자치 정부를 설립하기 위하여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지만 자치권을 반대하는 표가 더 많아 무효화 되었다. 1979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인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정부가 시작되면서 웨일스의 노동당과 그 지지층과의 갈등이 극대화 되었다.  "대처" 정부의 경제 정책은 웨일스 산업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그로인하여 1980년대는 웨일스의 자치 정부에 대한 요구와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웨일스 법안(Welsh Act 1998)이 제정되어 웨일스는 공식적 자치권을 부여받게 된다. 1921년, 자치 정부 법안을 제출하여 거부당한지 77년만에 웨일스는 웨일스 의회(Welsh Assembly)가 설립되었고 자치 정부를 수립(1998년)하게 되었다. 이는 웨일스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웨일스어(웨일스어 법안 1998)와 문화 운동도 활발하게 이어졌으며 20세기에는 웨일스어가 공식 언어로 인정받게 된다. 2006년, 웨일스 의회는 1998년에 제정된 웨일스 법을 보완하고, 의회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여 웨일스 정부 법안(Government of Wales Act 2006)을 통과 시켰다. 이로써 웨일스 의회는 교육, 건강, 환경 등 여러 분야의 다양한 정책을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웨일스는 현재 정치적으로 독립국,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언어, 문화등 다양한 민족적 정체성을 세워나가고 있다. 

- 웨일스의 정치

웨일스의 정치 체계는 웨일스 의회 (Welsh Parliament)를 중심으로 구성된 자치 정부이다. 의회는 지역 주민의 요구를 반영하고 법률을 제정하며 정책을 수립한다. 정부는 총리의 지도아래 행정을 수행한다. 의회는 지역구 의원 40명(40개 지역구)과 비례대표 의원 20명 등 총 6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주요 정당에는 노동당, 민족주의당, 보수당, 자유 민주당이 서로 경쟁하며 영국의 한 부분으로, 영국 정부와의 관계와 협력을 통해 자치권을 행사한다.

- 웨일스의 경제

웨일스의 경제는 농업, 관광, 서비스 산업과 제조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제조업과 석탄, 철강 산업에 크게 의존해 왔다. 그러나 현재, 서비스업, 생명과학, 재생 에너지, 기술 산업 등으로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농업은 웨일스 경제의 중요한 부분으로 율류, 유제품, 과일, 채소가 생산되며 관광업은 웨일스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인해 크게 발전였으며 금융, 교육, 건강 관리 등 서비스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웨일스의 GDP는 약 690억 3천만 달러이며 이는 영국 내에서 19번째로 큰 경제 규모로서 영국 전체 GDP의 약 3.5%를 차지한다. 웨일스 경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생산성이 비교적 낮으며 COVID-19 팬데믹 영향으로 큰 타격은 받았지만 회복과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 웨일스의 교육 

웨일스 교육 체계는 유아, 초등, 중등, 고등 교육으로 진행된다. 유아 교육은 3세부터 다양한 조기 교육을 진행하며, 5~11세까지 아동을 대상으로 읽기, 쓰기, 수학 등 기초적인 초등 교육이 이루어진다. 11~16세까지의 중학교 과정은 Gcse(General Certificate of Secondary Education)를 취득하기 위한 다양한 과목을 공부한다.

16세~18세까지의 고등 교육은 2년간 A-level 과정 또는 직업 교육을 진행하며 이후 대학에 진학하며 교육 과정에서 언어는 웨일스어와 영어, 모두 사용한다. 중요 대학으로는 카디프 대학교(Cardiff University), 웨일스 대학교(University of Wales), 스완지 대학교(Swansea University), 북 웨일스 대학교(University of North Wales) 등이 있다. 웨일스는 교육 수준을 향상 시키기 위하여 2022년, Curriculum for Wales와 같은 새로운 교육 과정을 비롯한, 다양한 정책을 시도하고 있으며 모든 학생들에게 동등하고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4. 웨일스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웨일스의 유적지

웨일스 카디프 만

웨일스는 풍부하고 다양한 유적지를 가지고 있다. 카드프에 위치한 카드프 성(Cardiff Castle)은 로마 식민지 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성이며 노르만의 지배를 받으며 확장되었다. 체프스토우에 위치한 체리 시리(Chepstow Castle)는 11세기에 세워진 석조 건물(중세의 성)로서 로서 웨일스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카펠리에 위치한 카펠리 성(Caerphilly Castle)은 웨일스에서 가장 큰 성이며, 에이릴리에 위치한 에이릴리 성(Abergavenny Castle)은 11세기에 세워진 성으로서

웨일스 스탈리 오프샤 언덕

역사 박물관이 있다. 벨라스에 위치한 펜트리 사원(Penrhyn Castle)는 19세기의 노르만과 고딕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며, 링크서드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링크서드 성(Raglan Castle)은 왕실과 귀족들의 정치적 분쟁을 보여주는 성이다. 이 외에도 웨일스 전역에는 로마 제국 (Roman Ruins) 의 유적지들이 많다. 카르마르텐(Carmarthen), 포르트 마딘(Portmadog)에는 로마 도시의 흔적들이 남아있으며 카르마르텐에 위치한 카멜리 성(Carmarthen Castle)은 로마 시대의 유적 위에 세워진 성으로서 좋은 관광지이다. 북웨일스의 카슬리시에 위치한 카슬리 대 성당(Caernarfon Castle)는 웨일스 왕국이 정체성을 보여주며, 북웨일스의 코너웨이에 위치한 코너웨이 성(Conwy Castle) 1283년에 건축된 중세의 역사를 보여준다. 웨일스의 북서쪽에 위치한 앵글시 섬 (Anglesey`s Mythical Sites)에는 켈트 신화화 관련된  유적지가 있다. 웨일스 중부, 브렉농(Brecon) 근처의 브렉농 고원(Brecon Beacons National Park)에는 고대 유적과 선사 시대의 돌탑이 있다. 웨일스 서부의 프레셀리 힐스(Preseli Hills)에는 B.C. 3천년경에 세워진 스톤헨지(Stonehenge)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B.C.2500년경, 이 스톤헨지는 당시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 단계를 걸쳐, 잉글랜드 남부의 윌트셔 주의 살리버리(Salisbury)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 웨일스의 자연 경관

웨일스 앵겔시 섬

웨일스 북서부의 스노도니아 국립공원(Snowdonia National Park)는 호수와 숲, 그리고 산악 경관으로 유명하며 이곳에 웨일스에서 가장 높은 약 1,085m의 스노든 산(Mount Snowdon)이 있다. 웨일스 서남부에 위치한 펨브룩셔 해안 국립 공원(Pembrokeshire Coast National Park)은 아름다운 해안선과 해변 그리고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웨일스 남부에 위치한 브렉컨 비컨스 국립 공원(Brecon Beacons National Park)은 광할한 고산지대와 계곡, 강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으며 별빛을 관측하기에 좋은 관광지이다. 웨일스 북서부의 올란드 섬(Anglesey Island)은 웨일스에서 가장 큰 섬이며 멘아이 해협을 가로지르며 섬으로 연결되는 멘아이 다리(Menai Bridge)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웨일스 중부의 브렉농 비콘스 국립 공원(Brecon Beacons National Park)은 아름다운 산과 계곡, 폭포, 선사시대 유적지로 유명하며 국립 고원 안에는 블랙 마운틴(Black Mountain) 산맥이 독특한 경관을 제공하고 있다. 웨일스 남부의 카디프만(Cardiff Bay)은 조수에 따른 변화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드러낸다. 웨일스의 펨브룩셔(Pembrokeshire)에 위치한 프렌지우르 해변(Penbryn Beach)은 웨일스의 숨겨진 보석으로 알려졌으며 아름다운 바위 절벽과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웨일스와 잉글랜드 맨체스터 경계에 위치한 스탈리 오프샤 언덕(Stali Offa`s Dyke)은 고대의 경계선으로 역사적 가치를 지니며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아스왕의 전설을 가진, 자존심이 강한 나라, 웨일스는 수천년의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자랑하며여러 국립 공원과 울창한 숲, 호수, 강, 해안선과 해변을 가진 아름다운 나라이다. 노르만의 오랜 지배 속에서도 저항을 굽히지 않았으며 잉글랜드의 일부로 남았지만 자치적 독립국가로서 다양한 산업을 육성하고 성장시켜 가고 있다.  사회적 평등과 포성성을 중요시하며 교육과 건강, 문화적 보존과 발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