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

스코틀랜드, 킬트(kilt)입고 백파이프(Bagpipe) 부는 나라

by 돌야dolya100 2024. 9. 30.

스코틀랜드(Scotland)의 공식적 명칭은 The Kingdom of Scotland이며 일상적 명칭은 영어의 "스코틀랜드(Scotland)", 게일어 명칭은 "알바(Alba)"이다. 스코틀랜드는, 고대 "게일어(Gaidhlig, 켈트어의 한 갈래)"를 사용하였던 아일랜드 부족 집단인 "스코티(Scoti)"에서 유래하였다. 로마 제국은 아일랜드 사람들을 "스코티"라 불렀는데 스코티는 라틴어로 게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4세기와 5세기 사이, 게일족의 한 분파였던 "스코티 부족"이 스코틀랜드 서쪽 해안 지역에 정착하여 "달 리어타(Dal Riata)" 왕국을 세우고, 스코틀랜드를 지배함음로서 "스코티의 땅"이란 뜻의 "스코틀랜드(Scotland)"라 불렀다. 이 스코티(Scotia)가 영어로 변형되면서 스코틀랜드(Scotland)로 발전하였으며, 이것을 게일어로는 알바(Alba)라 하며 "알러바"로도 발음된다.

알바는 고대 게일어에서 스코틀랜드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알비온(Albion)"에서 유래하였다. 잉글랜드 도버 해안의 절벽들은 모두 하얀 석회암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을 보고 1세기의 로마인들은 브리튼 섬을 "알비온(하얀땅)"이라 불렀다. 로마 제국은 브리튼 섬 전체를 알비온이라 불렀지만, A.D.410년, 로마군이 브리튼 섬에서 철 수 한 후, 켈트족과 피크트족(켈트족 한 분파)이 거주하면서 브리튼 섬의 북쪽(스코틀랜드)을 가리키는 의미로 "알바"라 부르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에 정착한 게일족의 스코티 부족도 스코틀랜드를 "알바"라 불렀는데 그것은 게일어를 사용하는 스코티 부족에게는 고향을 상징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연합으로 인하여 영어가 더욱 널리 사용됨으로서 스코틀랜드가 공식적 이름이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공식 언어는 영어이며 공식 문서, 교육, 법률, 미디어, 공공기관, 의사 소통 등에서 주로 영어가 사용되었다.스코틀랜드의 2% 정도는 게일어(켈트어 한갈래)를 사용하고, 스코틀랜드 북부와 동부지역에서는 넉트어(중세 영어에서 발전한 언어)를 사용한다. 

스코틀랜드 지도

1. 스코틀랜드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스코틀랜드의 영토와 수도

스코틀랜드의 영토 면적은 78,772 제곱킬로미터이며 산맥(그램피언 산맥, Grampian Mountains), 호수(로몬드 호수, 네스 호수), 많은 섬들로 구성되었으며, 잉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와 함께 영국을 구성하는 나라이다.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북부에 위치하며, 남쪽의 경계는 잉글랜드로서 약 154Km 길이의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다. 북쪽은 북해 및 아이슬란드와 해양 경계선을 이루고, 서쪽은 대서양, 동쪽은 북해를 바라본다.

스코틀랜드에서 제일 큰 도시는 서부에 위치한 "글래스고(Glasgow)"이며 면적은 175.5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2023년 기준, 61만명 정도, 경제, 예술과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다. 스코틀랜드의 수도는 "에딘버러(Edinburgh)"이며 총 면적은 264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2023년 기준 54만명 정도 거주한다. 에딘버러는 스코틀랜드에서 글래스고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도시이며 정치,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

- 스코틀랜드의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스코틀랜드의 인구는 약 5백 5십만명이다. 스코틀랜드 전체 면적에 비하면 인구 밀도는 낮으며 대부분 인구가 도시에 집중되어 있다. 인종 비율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백인(White)이 96%,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등 아시아계(Asian)가 2.7%, 아프리카, 카리브해 출신의 흑인(Black)이 1.2%, 기타 혼혈과 소수 민족이 1% 정도이다.

 

2. 스코틀랜드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스코틀랜드의 역사

스코틀랜드 해들링턴 월

스코틀랜드의 역사는 고대, 중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연합왕국시대(그레이트 브리튼 왕국,1707년), 현대로 나뉜다. 고대의 스코틀랜드는 겔트족의 정착으로부터 시작된다. B.C. 6세기에서 B.C.1세기 사이에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여러 많은 켈트족의 부족들이 스코틀랜드로 이주하여 정착하여 부족 공동체를 이루었다.

B.C. 1세기에서부터 A.D.2세기까지 로마 제국의 스코틀랜드 침략이 이어졌다. 로마는 스코틀랜드 지역을 "칼레도니아(Caledonia)"라 부르며 스코틀랜드의 켈트족과 충돌하였다. B.C.55년과 5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브리튼 섬을 탐사하였고, 11년 후, B.C.43년,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Claudius, 4번째 황제)"의 명령으로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Aulus Plautius)" 장군과 4만명의 로마군이 브리튼 섬을 정복하였지만, 북쪽 스코틀랜드까지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은 로마 군대에 맞서 저항였으며 A.D.83년 갈리카 전투(Battle of Mons Graupius)"는 그 저항을 상징하는 전투였다. "가이우스 루킬리우스(Gaius Agricola)" 총독이 이끄는 로마군은 스코틀랜드 북부로 진격하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의 켈트족들이 지금의 "그레이트 글렌(Great Glen)" 지역의 "몬스 그라우피우스(Mons Graupius)"에서 결집하여 대규모 전투(갈리카 전투)를 벌였다. 이곳은 현재 네스 호수(Loch Ness)로 유명한 곳이며, 갈리카 전투는 스코틀랜드의 겔트족이 로마군에게 대패하였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로마군에 더욱 저항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A.D.122년, 로마의 14번째 황제인, "하드리아누스(Hadrian, 76~138년)" 황제는 로마의 북부 국경을 방어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경계에 길이 117km의 병영, 마을, 방어시설이 포함된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을 건설하였다. A.D.142년부터, A.D.144년 사이,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nus Pius) 명령으로 "안토니우스(Antonine Wall)" 방벽이 스코틀랜드 북부에 건설되었다. 이 방벽은 약 63km로서 지금의 글래스고(Glasgow)에서 에딘버러(Edinburgh)까지 뻗어있다. A.D.200년경, 로마군은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의,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과 안토니우스 방벽(Antonine Wall) 주변에 주둔한채 스코틀랜드의 켈트족들로부터 영토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시기 로마는 공격보다는 방어 전략에 집중하여 로마 제국과 식민지들을 안정시켰다. A.D.200년경, 스코틀랜드의 켈트족은 리크트족(Picts)과 스코티족(Scoti)이었으며, 이 부족들은 지속적으로 로마군을 괴롭히며 저항 하였다.

300년대 후반, 기독교가 스코틀랜드 전역에 전파되어 점차 기독교인이 증가하였다. 313년, 로마는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통해 국교를 기독교로 선언하였다. 이 영향으로 로마 제국과 식민지에는 기독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4~6세기까지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기독교 전파에 힘쓴 인물들은 432년 패트릭(Patrick, 5세기)을 시작으로 니콜라스(Ninian, 5세기), 콜롬바(Columba, 6세기 중반), 어거스틴(Augustine, 6세기), 킴프리(Kessog, 6,7세기), 메논(Mungo, 6,7세기),  저스틴(Justin, 6,7세기) 등이 있다. 기원 전, 후부터 내전과 전쟁이 반복된 로마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를 지속하기 어려워졌고 2세기 중반부터 로마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여 410년에는 완전히 철수하였다. 로마군 철수 후, 스코틀랜드 북부와 중부를 기반으로 피크트족이 여러 부족 국가 형태로 나뉘어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고, 500년대 초반,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서부 "아가일(Argyll)"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스코티족은 스코티족의 강력한 지도자, "페르구스 모르(Fergus Mor)"에 의해 "달 리어타(Dal Riata)"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스코틀랜드의 모든 왕족들은 페르구스 모르의 후손임을 강조하여 왕권 계승의 정당성과 권리를 주장하게 될 만큼 스코틀랜드의 정통성에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6세기 말, 피크트 족의 지도자, 브리데 1세(King Bridei)가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피크트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6세기의 피크트족과 스코티족은 서로 전투와 동맹을 맺으면서 함께 성장해갔다. 이 두 부족(피크트족, 스코티족)은 9세기에 통합되면서 스코틀랜드의 국명의 기원이 된다. 또한 남쪽, 잉글랜드의 브리튼 족의 "스트라클라이드왕국(Kingdom of Strathclyde, 5~11세기 존재)은 스코틀랜드의 남서부와 브리튼 서부에 정착하여 왕국을 건설하였고, 앵글로 색슨족들도 스코틀랜드로 이주하여 정착함으로서 "노섬브리아 왕국(Northumbria)"을 세웠다. 이후, 이들 왕국들은 서로 충돌하며 성장해 나갔다. 이 충돌은, 600년대는 남쪽의 노섬브리아 왕국(Northumbria)이 점차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생겨났으며 노섬브리아 왕국은 스트라클라이드 왕국과 피크트 왕국, 달 리아타 왕국과 차례로 충돌하면서 스코틀랜드에서 세력을 과시하였다.

603년에 벌어진 노섬브리아 왕국과 달 리아타 (당시 왕은, 아에단 막 가브란, Aedan mac Gabrain)의 전투에서 승리, 627년, 노섬브리아 왕국(당시 왕은 에드윈)과 고도딘 왕국(브리튼족)의 에딘버러(당시는 에든푸르, Din Eidyn)를 정복함으로서 매우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7세기 후반과 8세기 초, "브리데 2(Bridei 2)"가 통치하였던 피크트족이 강력해져서 다른 왕국들이 피크트족을 상대하기가 어려웠으며 달 리아타 왕국과 정략 결혼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선교사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피크트족과 스코티족(달 리아타)에 전파됨으로서 두 부족의 정치적 통합이 서서히 진행되었고 동시에 710년, 피크트 왕국은 "브리데 1세"에 의해, 여러 부족이 통합된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스코티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달 리아타 왕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732년, 스트라클라이드 왕국과 노섬브리아 왕국의 전투, 751년 달 리아타 왕국과 아일랜드의 교류 등, 700년대는 여러 왕국의 전투와 정치적 통합으로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843년, 피크트 족의 왕이 된  "켈리크 막 알핀(Kenneth MacAlpin)"은 피크트족과 스코티 족의 통합을 이룬 왕으로서 스코틀랜드 왕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켈리크 막 알핀 왕은 810년, 달 리아타 왕국의 왕이었던 "알핀 막 에이드(Ailpin mac Eochaid)"와 스코티 왕국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켈리크는 알핀(Alpin) 왕가의 왕족으로서 스코티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달 리아타의 통치자로 성장한 켈리크는 피크트족과의 전투와 갈등을 경험하면서 843년 피크트 왕국의 왕이 되었고, 곧 바로 달 리아타 왕국과 피크트 왕국의 통합을 이루어 "스코틀랜드의 초대 왕"이되었다. 840년, 스코티 족의 달 리아타 왕국이 스트라클라이드 왕국을 정복함으로서 스트라클라이드 왕국은 10세기까지, 점차 스코틀랜드 왕국에 흡수되었다. 858년, 켈리크 사망 후, 스코티와 피크트족은 왕위를 두고 갈등과 충돌로 인해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왕들이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Scandinavian Peninsula)의 바이킹이 침략하여 스코틀랜드의 해안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9세기 후반,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노섬브리아 왕국과도 전투를 빈번하게 치루어야 했으며, 스코틀랜드 북부와 서부 해안으로, 바이킹들의 적극적인 침략과 청착도 이어졌다. 878년, 스코틀랜드 북부와 서부 해안지역에 정착촌을 세우고 내륙으로 침략과 약탈을 일삼았던 바이킹과의 "스토클리르 전투(Battle of Stollager)"는 유명하며 어느쪽이 이겼는지...? 결과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지속적으로 바이킹과 전투를 해야했다. 9세기 말(880년~900년대 초), 알핀 왕조의 후계자들이 통치하였던 시기로 왕권은 불안했고 권력 다툼과 내부 갈등히 심하였다. 스코티와 피크트족은 서로 통합되어 스코틀랜드 왕국을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두 부족간의 갈등과 왕위 계승을 두고 권력 싸움이 치열했다. 이런 상황에서 889년, 스코틀랜드에는 "듀그랏 막 켈리크(Dugall mac Kenneth)"와 같은 새로운 강력한 왕들이 등장하였다.

900년대의 스코틀랜드는 스코티 왕국, 피크트 왕국, 스트라클라이드 왕국으로 다시 분열된다. 아르고일(Argyll)을 기반으로 한, 스코티 왕국은 900년대 중반에는 스코틀랜드 전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9세기 중반, 스트라클라이드 왕국은 스코티 왕국에 다시 통합됨으로서 스코틀랜드 왕국의 기반이 되었다. 이것은 에드먼드 1세에 의한 것으로서, 939년, "에드먼드 1세(Edmund 1)"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어 바이킹과 전투로 인하여 지친, 스코틀랜드의 스크라클라이드(당시 왕은 도널드 2, Donald 2)를 945년에 침략하였다. 이 일로 도널드 2세는 퇴위 당하였고, 에드먼드 1세는, 스트라클라이드 왕국을 스코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게함으로서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정치적 지배를 감당해야 했다. 1005년, 스코틀랜드의 통치자 "말콤 2세(Malcolm)"는 스코틀랜드의 여러 왕국을 통합하였고 잉글랜드와의 갈등속에서도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1040년 말콤 2세의 손자였던 "맥베스(Macbeth, 1005~1057년)"가 전임 왕이었던 덩컨 1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왕위에 오른다. 맥베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서 악하고 탐욕적 인물료 묘사되었다. 1057년, 맥베스는 "말콤 3세(Malcolm, 1058~1093년)"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말콤 3세의 통치는 잉글랜드와 관계가 개선되어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졌다. 1124~1153년, 다윗 1세의 통치 기간, 스코틀랜드는 다시 잉글랜드와 갈등으로 잉글랜드(스티븐 왕)와 전쟁을 벌였지만 패전함으로서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는 계속되었다. 다윗 1세의 죽음 이후, 뒤를 이어 1165년, 왕이된 위리엄 라이언(William the Lion)은 1174년 잉글랜드(헨리 2세, Henry 2)와의 알프레드 전투(Battle of Alfred)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게 되며 1189년, 윌리엄이 잉글랜드와 조약을 체결하고 독립하게 되지만 여전히 잉글랜드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야 했다. 1200년대 스코틀랜드는 귀족들의 반란과 권력 다툼으로 혼란이 지속되었다. 1296년 4월 27일,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다시 침략하여, 지금의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의 "더인(Dunbar)"에서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와 "앤드류 모레이(Andrew Moray)"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독립군과 대규모 전투(더윈전투, Battle of Dunbar)를 벌였으며 잉글랜드의 대승으로 끝났다. 1297년 9월 11일,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독립군은 "스털링 다리 전투(Battle of Stirling Bridge, 1297년 9월 11일)"에서 잉글랜드에 승리하였다. 그러나 1298년, 7월 22일 일어난 "포르트 나우 전투(Battle of Falkirk)"에서 대패함으로 저항이 약화되었다. 8년후, 1306년,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로버트 더 브루스(Robert the Bruce, 1274~1329년)"는 잉글랜드에 대한 독립 전쟁을 개시하였다. 1307년 7월 24일에 벌어진 "모어턴 전투(Battle of Methven)"에서는 패전하였지만 독립군을 재 조직하여 1314년, 6월 23일, 24일에 치룬,  "배녹번 전투(Battle of Bannockburn)"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어 독립을 바라보게 되었다. 1328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Treaty of Edinburgh-Northampton)"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로버트 더 브루스"는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인 1329년 6월 7일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데이비드 2세가 5살의 어린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발리올(존 발리올의 아들)"은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여 잉글랜드 귀족들의 지지속에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였고 1332년 9월, 듀프린 전투(Battle of Dupplin Moor)에서 승리를 거둔 후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귀족들은 데이비드 2세를 지지하면서 "에드워드 발리올(Eaward Balliol)"에게 저항하였다. 1333년 4월 27일 "더윈전투(Battle of Dunbar)", 1333년 10월 17일 "더럼 전투(Battle of Durham)"에서, 잉글랜드 귀족 세력과 에드워드 3세(Edward 3)의 지원속에 에드워드 발리올은 데이비드 2세를 지지하였던 스코틀랜드 독립군을 연달아 섬멸하였다. 1335년 9월 30일,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uart)"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독립군이 에드워드 발리올의 잉글랜드 군대와 스코틀랜드의 마르(Mar)에 위치한 "컬커크(Culblean)"에서 전투(컬커크 전투, Battle of Culblean)가 벌어졌으며 스코틀랜드군의 대승으로 끝났다(제 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이 전쟁의 여파로 발리올의 정치적 입지는 좁아지고 약해졌으며 결국 1340년 초,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도주하였다. 1346년, 10월 17일, 다시 왕좌에 오른 데이비드 2세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지키고자 잉글랜드로 진격하여 "더럼 카운티(County Durham, 지금의 잉글랜드 북동부에 위치)"에 위치한 "더윈(Durham)"에서 에드워드 3세(Edwar 3)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를  "더윈 전투(Battle of Durham)" 혹은 네빌스 크로스 전투(Battle of Neville`s Cross)라 하며 결국 스코틀랜드군이 패배하였고 데이비드 2세는 포로로 잡혀 11년 동안 억류된다. 1357년, 데이비드 2세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평화 조약(Treaty of Berwick)"을 체결한 후 데이비드 2세는 석방되었고 그 대가로 스코틀랜드의 상당한 땅과 금전을 배상해야 했으며 스코틀랜드는 여전히 잉글랜드의 정치적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다. 1371년, 아들이 없는 데이비드 2세가 죽음을 맞이하자, 그의 조카 로버트 2세(Robert 2)가 왕이 됨으로서 스코틀랜드는 스튜어트 왕조(House of Stewart)가 시작되었다. 1390년, 로버트 2세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로버트 3세(Robert 3)"가 왕이 되었는데 이때 왕권을 두고 귀족들(더글라스 가문, House of Douglas)과 내부 갈등, 권력 다툼이 심각하였다. 그리고 1406년, 로버트 3세의 아들 제임스 1세(James)가 스코틀랜드를 떠나는 도중 잉글랜드(헨리 4세)의 군대에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18년 동안 억류된다. 그는 1424년 잉글랜드와 조약(서머싯 조약, Treaty of Somerset)을 맺은 후 스코틀랜드로 귀환할 수 있었다. 1430년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더욱 관계 강화를 위해 에든버러 조약(Treaty of Edinburgh)을 맺고 영토 분쟁을 해결하였으며 안정적으로 나라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왕들, 제임스 2세(1437~1460년), 제임스 3세(1460~1488년)와 제임스 4세(1488~1513년)때는 또 다시 내부적 갈등과 권력 다툼이 심했고, 잉글랜드와의 갈등으로 전쟁도 벌어졌다. 1513년에 벌어진 "플로디 전투( Battle of Flodden, 현, 노스럼벌랜드주의 플로든 필드)에서 제임스 4세는 전사하였고, 그의 아들 제임스 5세(1513~1542년)가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하였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다시 스코틀랜드를 압박하여 침략하였고 여기에 제임스 5세는 "팔로르(Flodden, 제임스 4세가 전사한 곳)에서 전투 중 전사하였다. 1542년, 제임스 5세의 딸,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가 여왕으로 즉위하였으며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1542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와 정략 결혼을 하였다. 이것은 잉글랜드를 더욱 자극하여 1545년 9월 10일 헨리 8세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였다(더란 전투, Battle of Darnley). 이 전쟁에서 분명한 승패는 나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는 종교 개혁(1545년)의 여파로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갈등과 내전이 심각한 상태였다. 1567년, 메리 스튜어트는 반란으로 퇴위 당하였고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19년간 잉글랜드에서 억류당하였으며 1587년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했다.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는 사촌이며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 "제임스 6세(James 6)는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메리를 이어 제임스 6세가 스코틀랜드의 왕(1567~1625년간 통치)으로 즉위하였다. 1603년 엘리자베스가 사망하자 제임스 6세는, 제임스 1세로 잉글랜드의 왕(1603년~1625년간)으로도 즉위하여 스코틀랜드에서는 58년동안, 잉글랜드에서는 22년 동안 통치하였다. 제임스 1세는 이 두나라의 통합을 위해 법률과 종교적, 문화적 모든 노력을 다했다.

17세기 중반, 스코틀랜드는 내전(청교도 혁명, Scottish Covenanetr Revolution)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제임스 1세의 죽음이후,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1)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잉글랜드의 찰스 1세는 의회와의 갈등으로 1629년 의회를 해산하고 11년동안 의회없이 통치하였다(무의회 시대, Personal Rule). 또한 찰스 1세는 영국 국교회(성공회, Anglican Church)를 지지하며, 영국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도입하고, 스코틀랜드 교회를 간섭함으로서 청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637년, 에딘버러에서 이 기도서를 강제로 강요하자, 스코틀랜드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여 저항하였다. 이, "에딘버러의 기도서 사건(The Prayer Book Riots)"으로 청교도 신자들은 청교도 연합체인 "카버너트(Covenanter)"를 조직하여 종교적 자유를 위해 저항하였다. 1638년, 스코틀랜드의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의 카버너트 조약(Covenant)에 서명하여 신앙을 지키기로 선언하였다. 결국 이것은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내전이 스코틀랜드 내전으로 번지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39년과 1940년, 청교도 연합체(카버너트)와 찰스 1세와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1942년, 잉글랜드는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여 1649년까지 지속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장군이 이끄는 의회파와 동맹을 맺고 찰스 1세에 대항하였다. 올리버 크롬웰 장군은 마르스턴 무어 전투(1644년), 프레스턴 전투(1648년)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으며, 스코틀랜드 청교도들이 찰스 1세의 처형을 강력하게 지지하여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하여 잉글랜드는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으며, 스코틀랜드와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졌다. 1650년, 크롬웰 장군은 스코틀랜드의 왕당파를 섬멸하기 위해 진격하였고 1650년, 첫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승리, 1651년, 워터루 전투(Battle of Worcester)에서 승리함으로서 스코틀랜드에 군사 정권을 수립하였고, 스코틀랜드는 크롬웰 장군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1658년 크롬웰 사망후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뒤를이었지만 공화국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1660년,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 2세의 왕정 복고를 결정하였으며 이것은 스코틀랜드에서도 동시에 이루짐으로서 두 왕국 모두 통치하게 되었다. 찰스 2세는 카톨릭을 지지하였으며 이로인해 의회와 갈등을 빚었고 스코틀랜드의 청교도와도 갈등이 이어졌다. 이시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문학, 연극, 과학등이 발전하였고 왕립 학회(Royal Society)가 설립되었다. 또한 해상 무역, 식민지, 해상 패권을 두고 "네델란드와도 전쟁(Second Anglo-Dutch War, 1665~1667년)"을 하였다. 챔스 전투(Battle of Lowestoft, 1665년, 잉글랜드가 해전에서 승리), 수단 전투(Battle of Scheveningen, 1667년, 네델란드 승리) 등 이러한 전쟁은 영국 해상력과 무역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707년 5월 1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합하는 "유니언 조약(Act of Union)"이 체결되어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Kingdom fo Great Britain)이 성립되었다. 이 결과 스코틀랜드 의회는 해산되어, 잉글랜드 의회와 합친 그레이트 브리튼 의회(Parliament of Great Britain)가 구성됨으로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이제 하나의 의회에서 통치하게 되었다. 여기에 반발한 스코틀랜드는 두번의 반란이 일어난다. 첫번째는 제임스 7세의 후손(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1715년)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반란으로 실패하였고 두번째는 "자코바이트(Jacobites, 스코틀랜드 왕권 회복 운동)"의 중요 인물이었던 찰리 왕자(Charles Edward Stuart)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컬로든 전투(Battle of Culloden, 1746년)에서 패배함으로 끝났다.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스코틀랜드는 산업 혁명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여 섬유 산업(면직물)과 철강, 기계, 특히 중공업이 발전하였으며 상업과 무역도 활발해졌다. 또한 이시기, 스코틀랜드는 문학, 철학,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귀족과 농민간의 계급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났고 중산층이 형성되어 사회 구조가 변화되었다. 빠른 산업화로 인해 인구는 도시로 집중되었으며 에딘버러, 던디, 글래스고와 같은 도시들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스코틀랜드는 섬유, 철강, 기계, 조선 산업 등의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도로, 운하, 철도의 발전도 이루었다. 1914~1918년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인명 피해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1939~1945년 2차 세계 대전때도 다시 한번 전쟁의 영향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970년대는 전통적 산업이었던 철강, 조선업이 쇠퇴하였고 금융과 같은 서비스 산업이 성장하여 에딘버러는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또한 석유 위기와 산업의 쇠퇴로 실업률도 증가하여 경제적 어려움이 더욱 심해졌다. 20세기 중반부터 스코틀랜드에서는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독립과 자치를 요구하였다. 그 영향으로 1999년, 스코틀랜드 자치 정부가 설립되었고 의회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이고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일정부분, 자치권만 부여받은 것이다. 2014년,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위해 전국민 투표가 이루어졌다. 이 투표에서 유권자의 55%가 독립을 반대함으로서 결국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 스코틀랜드의 정치

스코틀랜드의 정치는 복잡하다. 현재는 자치 정부와 의회 체계로 운영된다. 1999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설립되고 자치권을 부여받아, 나라 안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결정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교육, 사회 복지, 법 집행, 건강 관리, 환경,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행정 체계를 가진다. 그러나 외교와 국방, 통화 정책과 같은 분야는 여전히 잉글랜드 정부가 통제한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정책을 실행하고 의회에서 제정한 법률을 시행한다. 정부는 의회에서 선출된 장관들로 구성되며 정책과 행정을 관리하고 나라안의 다양한 정책을 수행한다. 스코틀랜드의 수장은 제 1 장관(First Minister)으로서 정부를 대표하며 주요 정책을 결정하고 의회와의 관계를 관리하며, 의회의 다수당이 추천하여 의회에서 선출된다. 장관들은 의회에서 선출된 의원 중에서 임명되며 각 부처의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한다. 스코틀랜드의 정당은 스코틀랜드 국민당(SNP), 노동당(Labour), 보수당(Conservatives), 자유 민주당(Liberal Democrats), 녹색당(Green Party) 등 여러 정당들이 활동한다. 스코틀랜트 국민당은 독립을 지지하며 의회에서 의석이 가장 많다.  2014년 독립 투표 이후에도 국민당과 민족주의 정당들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의회는 총 129명이며 73명은 지역구에서 직접 선출되고 56명은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의회는 교육, 건강, 환경, 농업 등 스코틀랜드 내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법을 집행한다. 스코틀랜드의 사법부, 최고 법원은 스코틀랜드 대법원(Supreme Court of Scotland)이며 법률을 해석하고 중대한 사건을 판결한다. 중범죄 사건을 처리하는 가장 높은 형사 법원은 고등법원(High Court of Justiciary)이며 민사 사건을 다루는 민사 법원(Court of Session)이 있다. 스코틀랜드 행정부는 의회와 긴밀히 협력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한다. 독립적 체계와 정부 구조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며 공정하고 효율적 행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스코틀랜드의 경제

스코틀랜드의 경제는 석유, 가스, 관광, 농업, 제조업 등 다양한 산업과 서비스 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해의 석유와 가스 개발은 스코틀랜드의 경제 중심이며 농산물, 소고기, 양고기 등 농산물로 유명하며, 또한 기계, 화학 제품, 식품과 음표 제조업이 주요 산업이며 스카치 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스코틀랜드의 GDP는 2023년 기준, 2310억 파운다(약2900억달러)이며, 잉글랜드 전체 GDP의 약 8%를 차지하는 경제 규모로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매우 큰 수치이다. 2023년, 스코틀랜드 경제 성장률은 3.5%이며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관광업이 재개되고 지역 산업이 회복되어 경제가 살아나고 성장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스코틀랜드 교육

스코틀랜 교육은 잉글랜드 안에서 독립적 체계이며 유아, 초등, 중등, 고등 교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3~5세까지 유아원(Nursery)을 통해 유아 교육과 초기 학습이 이루어지며, 5세~12세까지 7년 과정의 읽기, 쓰기, 산술, 사회, 과학 등 초등 학교(Primary School) 과정이 진행된다. 12~16세까지 4년 과정의 중학교(Secondary School) 단계에서 스코틀랜드 고등학고 자격증(SQA National Qualifications)을 준비한다. 이 과정까지는 무료 교육이며, 고등학교(Senior Secondary School) 과정은 16~18세까지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학생들은 Higher 및 Advanced Higher 자격증을 취득한다. 대학은 3년 과정의 학사 과정이며 2학년부터 전공 과목을 공부한다. 주요 대학에는 에딘버러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 글래스고 대학교(University of Glasgow),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 왕립 에딘버러 대학교(Heriot-Watt University) 등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교육은 정부와 교육청에 의해 운영되며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계속 다양한 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3. 스코틀랜드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스코틀랜드의 유적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처럼 역사적 유적지들이 풍성하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 위치한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은 고대 왕들의 거주지로서 현재, 왕관 보석과 운명의 돌(Stone of Destiny)이 보관되어 있다.  스털링 성(Stirling Castle)은 윌리움 월리스와 잉글랜드와의 전투를 다룬, 스털링 다리 전투(1297년)와도 관련된 유적지이다. 해들링턴 월(Hadrian`s Wall)은 로마 제국이 잉글랜드 북부를 방어하려고 건설한 성벽이며 이것은 스코틀랜드 남부 국경에 있다. 스카라 브래이(Skara Brae)는 B.C.3200년경의 오크니 제도에 위치한 신석기 시대 마을 유적이며 북 유럽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유적지이다. 13세기에 건축된 삼각형 모양의 칼레인 성(Caerlaverock Castle)은 스코틀랜드의 군사 건축을 대표하는 유적지이다. 글렌코 계속(Glencoe)는 1692년 글렌코 학살 사건으로 유명한 곳으로서 자연 경관이 결합된 곳이다. 로슬링 예배당(Rosslyn Chapel)은 중세 스코틀랜드의 종교 건축물로, 장미 십자군 및 신화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에 등장하여 유명해졌다.

- 스코틀랜드의 자연경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스코틀랜드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드라마틱한 산맥, 푸른 들판, 깊은 호수, 거친 해안선으로 이루어진 자연 경관으로 유명한 나라이다. 스코틀랜드 북부의 하이랜드(Scottish Highlands)는 거친 산악, 계곡, 대형 호수들로 유명하다. 하이랜드는 수천년 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광활한 자연경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하이랜드의 상징적 계곡 중 하나인 글렌코 계곡(Glencoe)이 있다. 하이랜드에서 가장 큰 산맥은 그램피언 산맥(Grampian Mountains)이며 이곳에 잉글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진 벤 네비스(Ben Nevis, 1,345m) 산이 있다. 그램피언 산맥 안에는 험준한 산맥, 넓은 숲, 계곡들, 맑은 강으로 이루어진,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케언곰스 국립 공원(Cairngorms National Park)이 있다. 그램피언 산맥의 서쪽에는 페니니 산맥(Monadhliath Mountains)이 있다. 이 산맥은 그램피언 산맥에 비하여 보다 완만하고 평탄한 지형, 언덕과 평야들로 이루어졌다. 스코틀랜드 중남부에 위치한 서던 하이랜드(Southern Highlands)는 글래스고(Glasgow)와 에딘버러(Edinburgh)에서 북쪽으로 40km의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으로서 스코틀랜드 중부에서 하이랜드로 넘어가는 지역이다. 서던 하이랜드 대표적 광관지는 트로삭스 국립 공원(Loch Lomond and The Trossachs National Park) 안에 있는 로크 로몬드(Loch Lomond) 호수이다. 로크 로몬드(Loch Lomond)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호수로서 면적이 71 제곱킬로미터, 길이 39km이며 호수안에 총 30여개의 섬들이 있다. 주변은 울창한 숲과 산악 지형으로서 하이킹에 적당한 974m의 벤 로몬드(Ben Lomond)산과 1,214m의 벤 로(Ben Ro)산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로크 네스 호수

하이랜드에는 길고 깊은 담수호들이 많은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네시(Nessie)라는 전설적 괴물의 출현으로 유명한 로크 네스(Loch Ness) 호수이다. 이 로크네스는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를 가로지는 계곡(그레이트 글렌)으로서 이 깊은 계곡 안에는 로크 네스 외에도 로크 오(Loch Oich), 로크 로키(Loch Lochy) 등 여러 개의 큰 담수 호수들이 있다. 로크 네스는 37km의 길이와 230m의 깊이로 유럽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호수 중 하나이며 전설적 괴물 네시로 인해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로크 네스 근처에는 13세기에 세워진 유르퀘트 성(Urquhart Castle)이 있으며, 이곳은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스코틀랜드의 북서쪽 지역에는 노스웨스트 하이랜즈(Northwest Highlands)가 있다. 이 산맥들은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지형과 비교적 낮은 산들로 모여 있으며 슬리오흐(Slioch) 산과 리아하흐(Liathach) 산이 대표적 산이며 토리돈(Torridon) 지역의 산들은 비교적 웅장하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에는 스카이 섬(Isle of Skye)과 같은 수많은 섬들(Islands)이 있다. 스카이 섬은 그 섬들 중 가장 큰 섬이며 스카이 섬 남부의 쿠일린 산맥(Cuillin Mountains)은 검은 쿠일린(Black Cuillin)과 붉은 쿠일린(Red Cuillin)으로 유명하다. 검은 쿠일린은 화강암으로 형성된 험준하고 날카로운 봉우리들로 구성되었으며 992m의 스카일리 비안(Sgurr Alasdair)이 가장 높은 산이다. 검은 쿠일린 북쪽에 위치한 붉은 쿠일린 또한 화강암으로 형성되었으며 쿠일린 산맥에 비하여 완만하고 부드러운 산맥이며 스가라흐(Sgurr na Stri, 500m)가 가장 높은 산이다.

스코틀랜드 스카이 섬

 스카이 섬은 여러 다양한 반도들이 있으며 그 중 에일라(Glen Elg)의 자연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 스카이 섬에는 스카이 섬을 대표하는 "소큐이리 성(Black Cuillin)"과 "오르노스 성(Armadale Castle)"이 유명하며 매력적 관광 거점으로 알려진 항구 마을 "포트리(Portree)"가 유명하다. 또한 스카이 섬의 동쪽 해안에는 유명한 자연 경관, "올드 맨 오브 스토르(Old Man of Storr)"가 있으며 이곳은 50m 높이의 스카이 섬을 대표하는 상징적  바위 기둥으로 유명하다. 스코틀랜드 북부에는 두 개의 섬 군도로 이루어진 오크니 제도(Orkney Islands)와 셰틀랜드 제도(Shetland Islands)가 있다. 오크니 제도는 스코틀랜드 본토와 약 20km 떨어져 있으며 대략 70개의 섬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20개의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오크니 제도의 가장 큰 섬은 오크니 섬(Mainland)이며 이곳은 선사시대 유적지 "스카라브레(Skara Brae)"로 유명하다. 셰틀랜드 제도는 스코틀랜드 본토에서 북동쪽으로 170km거리에 위치하며 노르웨이에서는 320km의 거리에 있다. 셰틀랜드 제도는 약 100개의 섬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15개의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 주요 섬은 러틀랜드(Ronaldsay), 시버스(Shetland Mainland)가 있으며 이곳은 바이킹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섬으로서 다양한 민속과 축제가 있는 곳이다. 특히 셰틀랜드 악단(Shetland Fiddle Festival)로 유명하며 북극의 빛을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스코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으로 꼽히는 약 800km의 케일린 해안(North Coast 500)을 소유한 나라이다. 이 해안은 스코틀랜드의 스카이 섬의 북쪽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으며 해안선과 깎아지른 절벽, 바위들, 울창한 초목, 조용한 해변으로 다채로운 자연 경관을 경험할 수 있다.

- 스코틀랜드의 킬트와 백파이브

킬트(Kilt)는 체크 무늬로 만들어진 치마 같은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킬트 입고 백파이프 연주하는 남자들

남성들의 전통적 의상으로서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의복이다. 킬트는 16세기부터 하이랜드 지역을 중심으로 착용하기 시작하여 18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현재는 특별한 행사나 축제 및 결혼식 등에서 주로 착용한다. 킬트를 만드는 원단은, 체크 무뉘로 이루어졌으며 이름은 타탄(Tartan)이다. 19세기부터 킬트와 타탄은 스코틀랜드에서 대중화되었다.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전통 악기는 백파이프(Bagpipes)이다.  종류는 하이랜드 백파이프(Highland Bagpipes)와 가드 백파이프(Scots Bagpipes)가 있다. 백파이프는 공기를 담은 가죽 주머니를 이용하여 소리를 내는 관악기이며 주로 전쟁에 나갈때, 축제, 결혼식 등 다양한 행사에서 사용된 악기이다. 백 파이프의 주 음역을 연주는 필라(Chanter)는 나무로 만든 것이며 손가락으로 구명을 눌러 다양한 멜로디를 연주하며 음정을 조절한다.     

 

고대부터 스코틀랜드는 켈트족, 노르만족, 바이킹족 등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이 서로 얽히며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중세시대에는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고 잉글랜드의 오랜 지배 속에서 독립에 대한 저항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여 왔다.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으로 잉글랜드와 합쳐졌지만 독립적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한 결과 1999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설립되었고 자치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킬트(Kilt), 타탄(Tartan), 하이랜드 댄스(Highland Dance)는 스코틀랜드의 전통을 대표하는 상징이며 그들의 민족 정체성을 그대로 반영한 문화이다. 스코틀랜드의 자연은 매우 다채롭기 때문에 탐험가, 자연 애호가, 사진 작가들이 많아 찾는 여행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