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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투발루, 여전사 알리카 쿨루의 전설을 가진 나라

by 돌야dolya100 2024. 10. 24.

투발루가 영국령이었을때는 엘리스 제도(Ellis Islands)로 불렸지만 197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현재 이름의 투발루(Tuvalu)가 공식적 명칭이 되었다. 폴리네시아어로 투발로는 숫자 8을 뜻하는 투(Tu)와 섬을 뜻하는 발루(Valu)의 합성어로서 여덟개의 섬을 뜻한다. 고대 초기 정착민들이 투발루의 9개 섬 중 8개의 섬에서 거주하였고 그 8개의 섬을 투발루라고 하였으며 나머지 한개의 섬 니울라키타(Niulakita)도 투발루에 포함되지만 고대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았고 최근에서야 사람들이 소수 정착하여 거주한다. 투발루의 공용어는 투발루어(Tuvaluan)와 영어(English)이다. 영어는 정부, 행정, 법률, 교육, 비즈니스 등 다양한 공적 문서에 사용되며 폴리네시아어 계열인 투발루어 원주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사용된다.

투발루 지도투발루 여자 알리카 쿨루투발루 니우타오 섬의 전사들
투발루 지도 투발루 여자 알리카 쿨루 투발루 니우타오 섬의 전사들

 

1. 투발루의 영토, 수도, 인구와 인종

- 투발루의 영토와 수도

투발루는 태평양의 중앙에 위치한 오세아니아에 속한 작은 섬나라이며 총 9개의 산호섬으로 이루어진 군도국가이다. 수도는 환초로 이루어진 푸나푸티(Funafuti)이며, 면적은 26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6천명 정도 거주하며, 전체 인구의 절반이 수도 푸나푸티에 거주한다. 영토의 대부분이 저지대 환초로 이루어졌으며 좁은 육지 띠와 넓은 석호로 이루어진, 전 세계에서 네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 투발루의 인구와 인종

투발루의 인구는 2023년 기준, 1만 1천명 이며 인구 증가율이 낮고 이민도 거의 없는 나라이다. 인종 비율은 폴리네시아계가 96%로서, 전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미크로네시아계가 4% 정도 차지한다.

 

2. 투발루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투발루의 역사

투발루는 고대 폴레네이사인들의 청착기와 유럽의 탐험, 식민지배와 독립, 그리고 현대로 나눌수 있다.

투발루 원주민들

투발루는 B.C.3000년부터 1000년까지 폴리네시아인들의 항해와 이주, 정착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 고대 원주민들은 투발루의 9개 섬중, 8개 섬에 정착하여 부족 공동체 사회를 이루었으며 부족을 다스렸던 족장을 알리키(Aliki)라 불렀다. 이들 원주민들은 각 섬을 중심으로 독립적 족장 체제를 유지하며 유럽인들이 투발루를 발견하기까지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키며,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부족장 알리키를 중심으로 부족 생활을 하였다. 1,000년에서 1,500년사이, 사모아의 원주민 일부가 투발루의 타마나(Tamana) 섬에 정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모아 원주민과 투발루 원주민은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으며 여

투발루 원주민들

러 세대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투발루에는 사모아 문화와 투발루 문화가 함께 남아있다. 15세기부터 17세기사이, 투발루는 주변의 여러 부족들의 공격과 침략을 받게되었다. 대략 1450년대에는 통가 전사들이 투발루의 니우타오(Niutao) 섬을 두 차례 침략하였다. 이때 투발루, 니우타오 섬의 지도자는 쿨루(Kulu, 여자)였으며 쿨루의 강력한 지휘아래 통가 전사들과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대표적 전투는 타가 아 카우파파(Taga A Kaupapa) 암초에서 벌어졌으며 여성 족장인 쿨루의 지휘로 투발루 전사들은 강력한 영감을 얻게되어 승리하였다고 전해진다. 

1568년 스페인의 탐험가 알바로 데 멘다냐(Alvaro de Mendana)가 처음으로 투발루를 발견하였다. "멘다냐"는 이 지역의 여러 섬들을 엘리스 제도(Ellis Islands)라 불렀다. "멘다냐"이후 19세기까지, 투발루를 찾는 유럽의 탐험가들은 없었다. 투발루는 3세기 동안 유럽과의 접촉없이 평화로웠다. 16세기 후반, 통가 전사들이 니우타오 섬과 바이투푸 섬을 또다시 침략하여 공격하였다. 이때 테이카마이토가(Teikamaitoga) 전투가 유명하며, 투발루가 모든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잘 막아냈다.  17세기에는 키리바시 전사들이 투발루의 니우타오 섬을 침략하였다. 이때 니우타오 섬의 투테아투아(Tuteatua)와 아가이아(Agaia)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키리바시 전사들은 니우타오 섬의 투테아투아에 진을 쳤고, 투발루 전사들은 니우타오섬의 아가이아에 진을 쳤다. 이 전쟁의 결과는 투발루 전사들의 승리로 끝났다.

 1860년대, 기독교 선교사들이 투발루를 방문하여 학교를 짓고 의료 서비스를 통해 선교 활동을 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존 웨슬리의 선교회 소속으로서 제임스 하우이(James Hauley, 1861년 투발루 도착)와 제임스 바우(James Bough) 선교사이다. 또한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프란시스코 마리 아기레, Francisco Mari Aguirre)도 투발루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투발루에는 유럽의 상인들, 포경 업자들, 기독교 선교사들의 방문이 많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기독교가 섬 전체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1888년부터 1894년까지, 스코틀랜드의 소설가이며 여행가였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태평양을 6년 동안 여행하면서 "남태평양 여행기(In the South Seas, 1896)"라는 책에서 투발루를 언급하였다. 따라서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수 없지만 "로버트"는 1894년 이전에 투발루를 방문한 것으로 여겨진다. 1892년, 투발루는 공식적으로 영국 서태평양 보호령(British Western Pacific Territories)이 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영국의 교육과 기독교가 더욱 활발하게 전파됨으로서 투발루는 서구 문물과 문화, 생활 방식으로 인하여 사회 전반에 걸처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은 1892년에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한 길버트 제도와 투발루에 대한 식민 통치를 강화할 목적으로 1916년, 길버트-엘리스 제도 식민지(Gilbert and Ellice Islands Colony)로 통합하였다. 길버트 제도는 지금의 키리바시를 말하며 1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저지대 국가로서 타라와(Tarawa), 부니에루(Bonriki)등이 있다. 영국은 길버트 제도와 투발루에 대하여 원활한 관리를 위하여 두 지역을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통합하였다. 이들 두 나라는 1979년에 각각 분리 독립하게 된다. 투발루가 독립하게 된 배경은 1914년부터 발발한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받음으로 시작되었다. 투발루는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으로 인한 식민지 체제에 대한 반발과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이 길버트 제도와 투발루를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한 시기가 바로 1차 세계 대전 중이었으며 이때는 전쟁으로 인하여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관리가 강화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통합과 강화된 식민 정책에 대하여 투발루 원주민들은 불만과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정치적 참여를 원했지만 영국 정부에 의해 무시되었다. 투발루의 저항은 조직적 반대 운동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길버트 제도와의 통합 이후 투발루는 자원과경제, 정치적으로 영국 정부의 정책에서 무시와 차별을 당했으며 이러한 불만은 2차 세계 대전과 함께 민족 저항으로 나타났다. 1939년부터 일어난 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전 세계는 식민지 해방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흐름은 투발루에서도 일어나 독립에 대한 요구가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2차 세계 대전 중, 투발루는 태평양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해상 경로에 위치하였고 그로 인하여 연합군과 일본군의 동시 관심지역이 되었다. 1943년 11월, 일본과 연합군은 지금의 키리바시의 타라와(Tarawa)에서 대규모 전투를 하였고 일본군은 패배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미군이 태평양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잡게 됨으로서 투발루에서는,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은 투발루의 수도 푸나푸티를 전략적 거점으로 확보하려 했지만 이곳은 미군이 이미, 군사 기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계 2차 대전의 영향으로 전 세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을 하게되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투발루에서도 일어났다. 1974년, 투발루에서는 길버트 제도(현, 키리바시)와의 분리와 독립을 위하여 국민 투표를 하였다. 그리고 4년 후, 1978년 10월 1일 투발루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완전한 주권 국가가 되었다. 독립후 투발루는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에 가입하여 영국 연방의 일원이 되었으며 수도는 푸라푸티(Funafuti)로 지정하였다. 21세기의 투발루는 기후 변화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투발루의 고도는 평균 해발 2m이다. 해수면 상승으로 큰 위기를 맞는 투발루는 국제 사회에 호소하며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투발루의 정치

투발루의 정치는 민주주가 기반이고 총리가 정부의 수장이며, 영국 국왕이 국가의 원수이다.

총리는 국가 행정과 정책을 담당하며 내각을 구성하고 정부를 운영하며, 의회 다수당에서 선출된다. 15명으로 구성된 입법부, 의회 (Parliament of Tuvalu)는 4년 임기의 단원제이며 각 섬에서 주민들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주요 정당에는 투발루 인민당, 민주당 등이 경쟁한다. 투발루의 사법부는 고등법원과 하급 법원으로 나누어지며, 독립적인 민법과 관습법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 투발루의 경제

투발루의 경제는 농업, 어업, 관광업으로 구성되며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코코넛, 바나나, 파파야 등이 있으며 자급자족 경제에 가깝다. 어업은 투발루의 주요한 산업이며 관광업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비하여 관광객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투발루는 외부 원조와 지원에 의존하고 있으며 GDP는 2023년 기준, 6200만 달러로서 전세계 190위~200위 사이의 작은 경제 규모이다.

- 투발루의 교육

투발루의 교육은 초등, 중등, 고등학교, 대학으로 진행된다. 6세부터 15세까지의 초등학교 과정은 무료 의무 교육이며 중학교는 4년 과정으로 진행한다. 투발루의 각 섬에는 초등학교가 있으며 중학교는 수도 푸나푸티(Funafuti)와 바이투푸(Vaitupu)에 두 개가 있다. 바이투푸의 모투푸아 중학교(Motufoua Secondary School)는 기숙사를 제공하며 10학년은 피지 주니어 자격증(FJC), 11학년은 투발루 자격증, 12학년은 남태평양 고등학교 자격증(PSSC)을 공부한다.  수도 푸나푸티의 페투발루 중학교(Fetuvalu Secondary School)는 투발루 교회에서 운영하며 케임브리지 교육 과정을 진행한다. 투발루에는 대학교가, 남태평양 대학(University of the South Pacific, USP), 하나뿐이다. 이 대학은 1980년대 투발루 학생들의 고등 교육을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현재 33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투발루에는 고등 교육 기관이 부족하기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해외 유학에 의존하며 특히 뉴질랜드와 호주로 유학을 한다.

 

3. 투발루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투발루의 유적지

투발루 라군

투발루는 환초로 이루어진 저지대 섬이라 유적지가 많지 않다. 그러나 니우타오(Niutao) 섬에는 15세기, 16세기의 전투와 관련된 유적지가 남아있다. 사모아(Samoa), 통가(Tongan), 키리바시(Kiribati) 전사들이 니우타오를 정복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교대로 침략하였다. 특히 타가 아 카우파(Taga A Kaupapa) 암초에서의 전투가 유명하다. 키리바시 전사들과의 전투 유적은 투테아투아(Tuteatua)와 아가이아(Agaia)에 있다.

- 투발루의 자연 경관

투발루 해변

투발루는 관광업이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자연 경관 만큼은 어느나라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투발루의 모든 섬들은 산호초로 둘러싸인 다양한 섬들로 구성되었다. 투발루의 수도가 있는 펀아푸티(Funafuti) 섬, 여러 작은 섬군으로 이루어진 바이투푸(Vaitupu) 섬, 11개의 섬으로 구성된 니우(Nui) 섬, 고대 전투 유적지를 가진 니우타오(Niutao) 섬 등이 유명하다. 이들 섬들은 낮은 조수때는 섬들 사이를 걸어 다닐수 있다. 투발루를 찾는 관광객은 많지 않지만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편안한 여행지로 좋은 나라이다.

투발루 환초

 

 

투발루는 해발 고도가 2m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투발루의 존재와 관련된 것으로서 투발루는 적극적으로 환경 문제에 나서며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 있다. 투발루 대다수의 주민들은 기독교이며 춤, 노래, 수고예 등 전통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켜왔다. 투발루는 교통과 통신 인프라가 낙후되었으며 외부와의 주요 연결 통로는 푸나푸티 공항이다. 낙후된 시설과 불편한 인프라로 인하여 대규모 관광객들이 찾지는 않지만 생태 관광, 전통 문화를 체험하려는 방문객들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