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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키리바시, 바다가 품은 나라

by 돌야dolya100 2024. 10. 26.

키리바시(Kiribati)의 공식적 이름은 키리바시 공화국(Republic of Kiribati)이다. 키리바시는, 1788년, 영국의 해군 대령, 토머스 길버트(Thomas Gilbert)가 키리바시를 발견한 후 길버트 제도(Gilbert Islands)라고 불렀고 현지 원주민들이 "길버트(Gilbert)"를 "키리바시(Kiribati)"로 발음하면서 불려진 이름이다. 키리바시의 공식적 언어는 영어와 키리바시어이다. 영어는 정부, 행정, 교육, 비즈니스 등 공적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며 키비라시어는 현지 원주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사용된다. 키리바시어(Gilbertese)는 폴리네시아어족에 속한다.

키리바시 지도키리바시 환초키리바시 환초
키리바시 지도 키리바시 환초 키리바시 환초

 

1. 키리바시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키리바시의 영토와 수도

태평양 중앙에 위치한 키리바시는, 33개의 섬과 암초로 이루어진 섬나라로서 크게 기르바스 제도(Gilbert Islands), 피닉스 제도(Phoenix Islands), 라인 제도(Line Islands)로 나누어진다. 기르바스 제도는 수도 타라와(Tarawa)가 있으며 키리바시의 주요 섬들이 위치한 곳이다. 피닉스 제도는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된 보호 구역이며 라인 제도는 일부의 섬에만 소수의 인구가 거주한다. 수도 타라와(Tarawa)의 면적은 16.5 제곱킬로미터이며, 2023년 기준, 인구는 6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타라와는 키리바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키리바시전체 인구의 50%가 거주하며 특히 남타라와(South Tarawa)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 키리바시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키리바시 인구는 12만명이며 인종 비율은 미크로 네시아계가 키리바시 인구의 96%를 차지한다. 나머지 4%는 외부에서 온 이주민들(유럽, 아시아 등)들로 이루어졌다.

 

2. 키리바시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키리바시의 역사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의 항해와 이주

키리바시의 역사는 고대 정착기, 유럽의 탐험과 식민지, 2차 세계 대전, 독립과 현대로 구분된다.  키리바시에 고대 원주민들이 정착한 시기는 B.C.3000년부터 1000년 사이이며, 폴리네시아인들의 정착으로 시작되었다. 키리바시의 고대 원주민들은 코코넛, 타로 등과 같은 농업과 다양한 해양 자원을 활용하며 어업에 종사하였다. 각 부족은 각각의 섬을 중심으로 부족 사회를 형성하여 부족장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체제로 운영되었다. 1606년, 스페인 탐험가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키로스(Pedro Fernandes de Queiros)가 처음으로 키리바시를 발견했지만 식민지로 삼지는 못했다. "페드로"는 타라와(Tarawa)섬과 오브스포스(Abemama) 등 키리바시의 여러 섬을 발견하고 탐험하였으며 이때부터 키리바시는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1799년 영국 해군 대령, 토머스 길버트(Thomas Gilbert)가 키리바시를 발견한 후 길버트 제도(Gilbert Islands)라고 이름을 붙였다. 1788년, "길버트"는 죄수들을, 영국에서 호주로 이송한 후 돌아가는 길에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탐험하고 무역항로를 개척하였는데 이때 키리바시와 여러 섬들을 발견한 후 그의 이름을따서 길버트 제도라 하였다. 길버트의 동료였던 존 마샬(John Marshall)도 함께 탐험에 참여하여 마샬 제도를 발견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따라 마샬 제도(Gilbert and Marshall Islands)로 불려지게 되었다. 길버트와 존은 영국 상선의 제 1함대 선장들이었으며 호주로 죄수들을 이송 한 후 함께 태평양의 북쪽 섬들을 발견하고 탐험하게 되었다. 길버트 제도(키리바시)는 마샬 제도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함께 탐험되었으며 인근 항로로서 중요한 거점으로 여겨졌다.  1892년, 영국은 키리바시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포하였고 1916년에는 길버트 제도(키리바시)와 엘리스 제도(바누아투)를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통합하였다. 영국의 통치아래 서구식 교육이 이루어졌고 기독교도 전파되었다. 원주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경험하면서 원주민들의 삶도 바뀌어졌다. 1941년, 일본군이 키리바시를 점령하였고 1943년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미국 해병대가 다시 탈환하는 과정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를 타라와 전투(Battle of Tarawa)라하며 연합군이 승리함으로서, 키리바시는 다시 영국의 통치를 받게되었다. 이 타라와 전투는 타라와 섬의 남쪽 끝에 위치한 작은 환초(Tarawa Atoll)로 이루어진 섬, 베티오(Betio) 섬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타라와는 여러 개의 섬과 산호초가 둘러싸여 있는 섬으로서 베티오는 타라와 환초 안에서 가장 큰 섬이었다. 길버트 제도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의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삼았으며 연합군은 이 섬들을 장악하여 일본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려야 했기 때문에 전투는 더욱 치열하게 일어났다. 타라와 전투는 미국 해병대의 상륙 작전으로 시작되었고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는 베티오 섬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3일동은 계속된 이 전투에서 연합군의 사망자는 1,000명, 부상자가 2,000명이 생겨났던 치열한 전투였다. 4천 8백명의 일본군은 거의 전멸하였고 17명의 포로만이 살아남았다. 타라와 전투로 인해 키리바시는 큰 경제적, 인명적 손실을 당했다. 영국 정부는 키리바시의 재건을 위해 원조를 제공하였다. 2차 세계 대전은 세계 식민지들이 해방을 하는 탈출구였으며 1970년대까지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하게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키리바시 또한 그 영향을 받아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 엘리스 제도의 주민들은, 1892년부터 통합되었던 길버트 제도와의 분리 독립을 영국에 요구하였으며 그 결과 1974년, 엘리스 제도는 공식적으로 길버트 제도에서 분리되었다. 그리고 1978년 투발루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하게된다. 1974년, 엘리스 제도가 분리될때 길버트 제도 또한 자치권을 더욱 강화하여 자치 정부를 수립하고 자주적 정부를 운영함으로서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한층 더 강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1979년 7월 12일, 키리바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키리바시 공화국(Republic of Kiribati)이란, 이름으로 독립국이되었다. 독립한 후, 키리바시는 영국 연방에 가입하여 영국의 일원으로 남았으며 주권을 가진 독립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 키리바시의 정치

키리바시의 정치는 독자적 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대통령 중심제 공화국으로 운영된다. 임기 4년의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행정을 수반하며 국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46명으로 구성된 의회는 단원제로서 4년 임기로 선출되며, 대통령과 법무 장관, 각 섬 지역을 대표하는 의원들이 포함된다. 의회는 입법권, 법률 제정, 정부 감독 등의 권한을 가지며 수행한다. 주요 정당에는 키리바시 유니티당(KUCP), 부흥당(KFP), 진실의 기둥당(BTK), 보호당(MMK)이 경쟁한다. 

- 키리바시 경제

키리바시는 넓은 배타적 경제 수역을 가지고 있다. 반면 땅은 좁고 자원이 부족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나라이다. 키리바시의 경제는 수산업, 관광, 외국 원조에 의존형이다. 키리바시는 얿은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인하여 참지 및 어족 자원과 해산물을 수출한다. 그러나 어족 자원의 고갈과 국제 시장의 가격 변동에는 취약하다. 키리바시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소유하고 있지만 낙후된 인프라와 기후변화(해수면 상승)로 인하여 관광 산업에 큰 타격을 받고있다. 키리바시의 주요 수출품은 코프라(코코넛 가공품)이며 코프라는 코코넛에서 얻은 기름을 만드는 원료이다. 그래서 키리바시의 농업은 주로 코코넛 생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키리바시의 좁은 땅, 제한된 토지에서 코코넛을 대량 생산하기에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농업 또한 제한적 경제구조이다. 키리바시의 경제는 규모가 작고 부족한 자원으로 외국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뉴질랜드, 일본, 호주 등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키리바시의 GDP는 2024년 기준, 2억 4,300만 달러이며 세계 176위에 해당하는 경제 규모이다.

- 키리바시의 교육

키리바시의 교육은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으로 진행되며 6세부터 14세의 기본 교육은 의무 교육으로 6년동안 진행된다. 중등 교육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포함되며 4년에서 5년동안 진행된다. 중등 교육은 학문과 직업 교육으로 진행되어 대학에 진학하거나 노동 시장에 진입하도록 학업을 진행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하여 학교 시설이 침수되거나 폐쇄되는 경우가 발생하며 전문적 교사 부족, 교사의 수준이 낮고, 교육 시설의 부족, 교과서, 학용품, 실험 재료 등 자원 부족으로 학생들의 학습 효과도 떨어진다. 키리바시의 대학은 키리바시 국립대학교(kiribati National University)가 있다. 키리바시의 교육 환경은 열악하다. 따라서 키리바시는 유네스코(UNESCO)와 같은 여러 국제 기구와 협력을 통해 교육 정책을 시행하며 호주, 뉴질랜드, 피지, 영국, 미국과 같은 나라들로 유학의 기회도 제공한다.

키리바시 고대 원주민들

 

3. 키리바시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키리바시 고대 유적지

타라와 섬에 위치한 부투 타비테우(Buariki)는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이 거주했던 마을과 집터로서 고대 석기, 도기 및 기타 유물들이 발견된 고대 유적지이다. 롱타르 섬(Long Island)은 고대 화석과 잔해들이 발견된 유적지이며, 톱제레 섬(Tobari Island)과 부아레키 섬(Butaritari Island)은 고대 폴리네시아인들의 정착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이외에도 거대한 돌을 쌓아 만든 메갈리스틱 구조물, 고대 원주민들의 무덤, 2차 세계 대전의 타라와 전투지등이 있다.

키리바시 해변

- 키리바시 자연 경관

키리바시는 넓은 태평양이 작은 섬나라로서 푸른 바다, 하얀 모래와 해변, 울창산 열대 우림 등 아름 다운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3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키리바시의 섬들은 매우 아름답다. 특히 키리티마티섬(Christmas Island)은 키리바시에서 가장 큰 섬이며 하얀 백사장과 석호가 아름답다. 피닉스 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깊은 해양 보호 구역이며 라인제도는 고립된 환경으로 인하여 다양한 행야 생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키리바시의 대부분의 섬은 백사장과 산호초로 둘러싸였으며 온화한 기후와 깨끗한 바닷물, 고요하고 평화로움 속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다.

 

 

키리바시는 지리적 특성상, 경제 개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산업과 관광업을 장려하고는 있지만 낙후된 인프라로 인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키리바시는 1979년 7월에 독립한 이후, 지구 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이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국가 존립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키리바시는 국제 사회에 계속 호소하며 도움을 청하고 있다. 태평양 지역의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경제와 기후 변화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풀어가려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