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

체코, 프라하의 봄을 이룬 나라

by 돌야dolya100 2024. 9. 24.

체코 지도

체코의 공식 명칭은 체코 공화국(Czech Republic)이며 2016년부터 "체코(Czech)"로 국제 사회에 알리고 있다. 이 "국명"은 체코 민족의 시조로 알려진 "체흐(Cech)"라는 인물에서 유래되었다. 체흐는 슬라브족의 한 부족을 이끌고 현재의 체코로 이주한 인물이며 체코 민족의 조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체코라는 "국명"은 1993년 1월 1일부터,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어 각각 독립국이 됨으로서 공식적으로 사용하시 시작하였다. 1993년 이전의 체코의 공식 명칭은 "체

체코 프라하의 봄

코슬로바키아 공화국(Czechoslovak Republic)"이었으며, 이 국명은 1918년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사용된 이름이다. 슬로바키아(Slovakia)는 특정한 민족의 시조는 없다. 단지 슬라브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서 슬라브 민족의 한 부족을 의미한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역사적으로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14일 앞둔, 1918년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였다. 독립 이후, 체코인과 슬로바키아 인은 서로 존중하며 하나의 국가를 이루다가 1993년 정치적, 경제적 차이로 인하여 평화롭게, 각각 분리, 독립국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각각 독립적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체코의 공식적 언어는 슬라브어 계열의 "체코어(Czech)"로서 교육, 행정, 미디어 등 모든 부분에 사용되며 일부 지역에서는 헝가리어와 독일어 등 다른 언어들도 사용한다.

 

1. 체코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체코의 영토와 수도

체코의 영토는 유럽의 가장 중앙에 위치하였으며 면적은 78,865 제곱킬로미터이다. 북동쪽은 폴란드, 북서쪽은 독일, 동쪽은 우크라이나, 남동쪽은 슬로바키아, 남서쪽은 오스트리아와 경계를 이룬다. 체코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며 주로 평야와 언덕으로 이루어졌고 "크르코노셰 산맥"과 "모라바 산맥"으로 유명하다.

수도는 프라하(Prague)이며 체코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면적은 약 496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2023년 기준, 약 130만명 정도 거주한다.

- 체코의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체코의 인구는 약 1,100만명이다. 이중 체코인은 슬라브 민족에 속하며, 체코 사회의 중심으로서 94%를 차지한다. 그외 슬로바키아인이 2%, 독일인 1%, 폴란드인 2%, 헝가리인 0.5%, 로마인(집시) 0.5%를 차지한다.

 

2. 체코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체코의 역사   

체코의 역사는 고대 슬라브 민족의 정착기와 중세, 근대와 현대로 나누어진다. 5세기와 6세기경부터, 체코 민족의 기원이 된, 슬라브 민족이 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에 이주하여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며 정착하였다. 이시기에 이미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에는 켈트족과 게르만족 등 여러 다양한 민족과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점차 슬라브 문화에 동화되어 갔다. 7세기 중반, 대규모의 슬라브 민족이 모라바 강(현,체코 모라바 지역) 유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모라바 공국(Principality of Moravia)을 세웠다. 모라바 공국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초기 국가의 형태였으며 슬라브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가 형성되었던 시기였다.  8세기의 모라바 공국은, 아바르족(몽골계 유목민)과의 갈등과 침략을 당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부족들의 단합이 더욱 강화된 시기였다. 또한 8세기의 모라바 공국은, 프랑크 왕국의 완전한 지배는 받지 않았지만 영향아래 있었다. 프랑크 왕국은 5세기 후반 클로비스 1세(Clovis 1,481~511년)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후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다졌으며 프랑크 왕국의 초대왕이며 신성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카롤루스 대제(Charlemagne, 768~814년)"때가 최 전승기로서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여 통치하였다. 모라바 왕국 초기에는 프랑크 왕국의 보호를 받았지만 독립적 세력을 유지하여 프랑크 왕국과 영토 분쟁을 겪게되었고,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9세기, 모라바 공국은 "대모라바 제국"으로 알려질 만큼 성장하였다. 그리고 기독교가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에 전파되었다. 863년 그리스 출신의 "키릴(Cyril,827년생)"과 "메토디우스(Methodius,815년생)" 형제가 "모라바 공국"으로 파견되어 슬라브족 언어의 문자 체계인 "글라골(Glagolitic)"을 창안하여 슬라브어로 된 성경과 기독교 문서를 번역하여 전파하였고 교육에도 힘썼다. 키릴과 메토디우스는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서 활동한 성직자들로서, 이들의 모라바 공국에 대한 복음 전파는 모라바 공국과 비잔틴 제국을 연결시키는 가교였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은 문화와 언어가 기독교와 슬라브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게 되었다.  9세기부터 헝가리인들이 중앙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함으로서 모라바 왕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 헝가리는 유목민족이었다. 이들은 유럽의 중앙과 동부(동유럽)에서 활동하며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이러한 헝가리와 모라바는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지역에 있었다. 헝가리는 영토 확장을 위해 모라바 공국을 공격하였으며 권력 다툼으로 내부 갈등이 극에 달했던 모라바 공국은 이러한 침략에 대비하지 못하였다. 헝가리가 모라바 공국을 정복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침략하는 과정에서 모라바 공국의 국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결국 907년 블리드 전투(Battle of Bratislava; 현재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근처)에서 모라바 군이 헝가리 군에게 대패함으로서 모라바 공국은 멸망하게 된다. 9세기 중반, 지금의 헝가리에, 헝가리 유목민들(마자르족)이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895년, 강력한 지도자 "아르파드(Arpad)"가 등장하여 다양한 부족을 통합하고 헝가리 왕국의 기초를 다지며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아르파드의 손자 "이슈트반 1세(Stephan 1, 969~1038년)"는 헝가리 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서 모라바 공국을 공격하여 정복한 왕이며, 모라바 공국을 정복한 후 1000년경, 헝가리 왕국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은 헝가리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6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체코 보헤미아 지역(지금의 프라하)에 이주하여 정착한 슬브라 민족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거주하였으며 그 부족 중 하나가 프라하를 중심으로 크게 성장하게 된다. 9세기 후반, 이들은 보헤미아 공국을 세웠으며 10세기 초에는 독립적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1212년 교황 인노센트 3세로부터 왕국의 독립성을 인정받음으로서 보헤미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4세기는 보헤미야 왕국의 최 전승기로서 보헤미아 왕국의 통치자였던 카를 "4세(Charles IV, 1316~1378년)"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오르게 된다. 카를 4세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의 후손으로서 보헤미아의 왕 "요한(John of Bohemia)"과 프랑스 왕국의 공주 "엘리자베스(Elizabeth of Bohemia)" 사이에서 태어났다. 1346년에는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하였고 1355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카를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를 "보헤미아(프라하)"로 삼았다. 보헤미아는 보이이족(Boii,켈트족의 하나)이 이주하여 살았던 지역으로서 로마인들이 보이이족을 "보이-헤이움(Boiohaemum)"이라 부른데서 변천하여 후에, "보헤미아"로 불려졌다. 보헤미아는 6세기부터 이주한 슬라브족의 정착과 기독교화 과정에서 더욱 발전하였고 이들에 의해 "체히(Cechy)"라고 불려졌다. 체히(Cechy)는 체코, 또는 보헤미아를 의한다. 15세기 초, 보헤미아 왕국은 카톨릭과 개신교단 중 하나인 얀 후스파(Hussites,후스는 체코의 신학자)와의 전쟁이 발생한다. 이 전쟁은 카톨릭 교회가 얀 후스를 이단으로 단죄하여 1414년 7월 6일 화형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얀 후스를 추종한 후스파는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에서 시청을 공격하였고 카톨릭 신자들을 공격하여 사망케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카톨릭은 군사 작전을 펼쳤지만 후스파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후 타보르 전투(1420년)에서도 후스파가 승리하였고,  2차 프라하 전투(1434년)에서는 내부 분열로 인하여 패배하여 후스파는 와해된다. 이 전쟁의 여파로 왕권이 약화된 보헤미아 왕국은 152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됨으로서 독립권과 자치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후스파의 이 전쟁은 16세기와 17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30년 종교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1618~1648년, 약 30년동안 유럽에서는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종교 전쟁이 벌어진다. 1618년부터 1625년,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카톨릭 세력에 반발하여 전쟁을 벌였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대부분 개신교였지만 보헤미아의 왕, 페르디난드 2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카톨릭 신자였다. 왕이 귀족들을 향해 카톨릭 신앙을 강화하고 개신교를 제재하려하자 여기에 반발한 귀족들이 프라하 성에서 카톨릭 관리들을 창문으로 던져 죽였다. 그리고 보헤미아 왕을 폐위하고 개신교 신자였던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러한 일로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 개신교와 독일 개신교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일로 1620년, 프라하 근처 백산(White Mountain)에서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백산 전투, Battle of White Mountain). 이 전투에서 개신교가 패배함으로서 보헤미아는

체코 백산 전투

다시 페르디난드 2세의 통치를 받게되었고 개신교는 와해되었다. 또한 보헤미아 왕국의 자치권은 더욱 약화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이 보헤미아 전쟁을 시작으로 덴마크 전쟁(1625~1629년), 스웨덴 전쟁(1630~1635년), 프랑스 전쟁(1635~1648년) 등 여러 나라와 여러 지역에서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 30년 전쟁은 1648년 "뮌스터 조약(Treaty of Munster)"과 "오스나브뤼크 조약(Treaty of Osnabruck)"을 통해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이 조약에서 영토가 재 조정되었고, 스위스와

체코 프라하 성

네델란드 등과 같은 나라들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되었으며, 카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적 관용을 강화하여 종교 갈등을 완하시켰다.  뮌스터 조약으로 인하여 1620년 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확실한 지배아래 놓이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House of Habsburg)은 13세기부터 20세기, 약 700년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왕조로서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스페인, 헝가리 등 여러 왕국의 왕위를 차지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막강한 가문이었다. 18세기의 보헤미아 왕국은 여전히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를 받으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중심지,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때 보헤미아를 통치하였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이었으며 프라하는 보헤미아의 수도로서 학문과 문화, 정치의 중심지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 집단이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였는데 그 중심에 보헤미아와 헝가리가 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보헤미아에서는, 점차적으로 체코 민족주의가 등장하였으며 1848년 보헤미아 자치권을 요구하며 오스트리아를 향해 혁명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같은해, 헝가리 역시 독립을 선언하고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였지만 패배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859년,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워 영토(롬바르디아)를 잃었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하여 독일 안에서 패권을 상실했다. 따라서 전쟁으로 인한 피로감, 정치적, 군사적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헝가리 귀족들과 1867년, 협상(Compromise of 1867)을 하였다. 이 협상으로 헝가리는 자치권을 얻게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중적 제국으로서 두 개의 독립된 정부와 입법부를 운영하면서 국방과 외교, 재정은 오스트리와 헝가리가 공동으로 관리하였다. 이런 와중에 체코인(보헤미아), 폴란드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자치권을 요구하며 독립을 전개해 나갔다. 1914년부터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한다. 이 전쟁의 시작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바르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을 당함(사라예보 사건)으로서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과 연합군(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미국)이 결성되어  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벌어졌고 1917년, 독일 잠수함이 미국 상선을 공격하면서 미국도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으며 전세가 불리해진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에 휴전 협정을 체결함으로서 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인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등 주요 제국들이 해체되고 붕괴되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과 같은 나라들이 독립을 하여 새로운 국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14일 앞둔, 1918년 10월 28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활약한 인물이 "에드바르트 베니시(Edvard Benes)"와 "토마스 가리그 마사리크(Tomas Garrigue Masaryk)"이다. 1918년, 독립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서로 연합하여 독립 국가를 건국하였으며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1938년까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1930년 초반, 독일의 히틀러는 영토 확장을 위해 독일계 민족(수데텐 독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체코의 수도 프라하와 가까운 "수데텐란트(Sudetenland)"를 독일에 병합하기 위하여 무력을 사용하려 하였다.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영국 총리(네빌 체임벌린)와 프랑스 총리(에두아르 달라디에), 이탈리아 독재자(베니토 무솔리니), 독일(히틀러)이 1938년 9월 30일, 뮌헨에서 회담을 열고 수데텐란트를 독일에 양도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체코는 초청되지 못함). 그리하여 수데텐란트은 독일에 양도되었고 독일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뮌헨 협정으로 체코의 주권은 심각하게 침해되었으며 독일의 군사적 팽창만 더욱 강화시켰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의 남은 지역도 정복하려고 1939년 9월 2일 폴란드를 침략함으로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게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지역을 정복하고 보호령으로 삼게된다. 나치 독일에 맞서 체코는 저항군을 조직하여 맞서 싸웠고, 많은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전세가 불리하여 많은 독일군들이 퇴각하는 중, 1945년 5월 체코의 저항군들이 독일에 맞서 싸웠고 시민들도 참여하였다. 1945년 5월 9일, 소련군이 체코 프라하에 도착하여 도시를 해방하였고 체코 저항군은 소련군의 지원을 받게되었다. 독일군을 몰아낸 체코 정부는 전후 복구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48년 2월 25일, 공산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여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주의 체제가 되었고 소련의 위성국가(동구권 국가)가 되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으로 알려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체코의 지도자 "알렉산더 두브체크"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것을 위협으로 간주하여 1968년 8월에 소련 군인들을 투입하여 무력으로 진압을 하였다. 1989년 11월 17일, "벨벳 혁명(Velvet Revolution)"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다. 평화적 시위와 시민들의 저항으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회복된 혁명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맞게된다. 1989년 12월 공산당은 정권을 포기하였고,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어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현대의 체코는, 1993년 1월 1일, 슬로바키아와 평화적으로 분리되어 각각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나누어졌다. 또한 1999년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동시에가입하였고, 2004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하였다. 그리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유럽 연합과 연결되었으며 현재, 안정적인 민주 정치 체제를 유지하여 유럽 연합과 정치, 외교, 경제를 함께하고 있다.

- 체코의 정치

체코의 정치는 민주주가 원칙이며 다당제와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의회를 통해 운영된다. 체코는 공화국이며 대통령은 국가의 수장으로서 시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고 임기는 연임이 가능한 5년이다. 정부는 총리와 내각으로 구성되며 총리는 정부 정책을 집행하고 행정 업무를 담당하며 하원에 의해 선출된다. 체코의 의회는 81명의 상원과 200명의 하원으로 구성되며 상원은 6년 임기로 선출되고, 하원은 비례 대표제로 선출된다. 상원은 법률의 검토와 수정, 주요 정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며 하원은 정부를 형성하고 법안을 제정한다. 체코는 다당제로서 주요 정당은 체코 사회민주당, 민주당, 안정적인 민주주의 연합, 체코 공산당 등이 있다. 체코의 법원은 독립성이 보장되며 헌법과 법률에 따라 운영된다. 헌법 재판소는 헌법의 수호와 법률의 적법성을 검토한다. 체코의 정치 체계는 민주적이다. 또한 투명한 절차를 통해 운영되고 있으며 시민의 참여도 중요하게 여긴다.

- 체코의 경제

체코의 경제는 수출 중심의 시장 경제이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기반한 경제 구조이다. 산업 구조는 제조업, 서비스업, 농업으로 구성되어 있고 제조업은 자동차, 기계, 전자 제품 등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으며 특히 자동차 산업이 발달하였다. 서비스업에는 금융, 관광, 정보통신 등이 발달되어 GDP의 약 65% 정도를 차지한다. 농업은 규모가 작지만 쌀, 보리, 포도 등 다양한 농산물이 생산된다. 체코의 주력 수출품은 자동차, 기계, 전자 제품, 화학제품이며 주로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유럽 연합이 무역 파트너국이다. 체코의 GDP는 약 4500억 달러이며 세계 40위에서 45위 권의 경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 체코의 교육

체코의 교육 제도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나누어진다. 6세~15세까지는 의무 교육이며 5년동안 초등학교에 다닌다. 중학교 과정은 3년이며, 일반 중학교와 직업 중학교로 나뉜다. 고등학교는 4년 과정이며 대학은 학사, 석사, 박사 과정으로 진행한다. 체코의 유명한 대학에는 프라하 카렐 대학교(Charles University), 체코 공과 대학교(Czech Technical University), 브르노 공과 대학교(Brno University of Technology) 등이 있다. 교육 과정의 주요 언어는 체코어이며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 교육도 활발히 진행한다. 체코는 문화와 역사 교육을 중요시 하며 예술, 체육도 중요시 한다. 따라서 체코의 교육은 유럽에서도 비교적 높은 수준이며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 또한 우수하다. 체코는 더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고자 교육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3. 체코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체코의 유적지

체코 국립공원

체코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적지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프라하 성(Prazsky hrad)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이며 성당, 궁전, 정원이 서로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으며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 사용하는 곳이다.

"체코 크룸로프 성(Cesky Krumlov Castle)"과 "올로모우츠 성(Olomouc Castle)", "카를슈타인 성(Karlstejn Castle)", "세제크 성(Sazava Monastery)", "브르노 성(Spilberk Castle)", "헤르드레즈 성(Hradcany)" 등과 같은 고대와 중세 역사를 보여주는 성과 수도원,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체스키 부드예요비체(Ceske Budejovice)"와 "피라드 스톤(Pilsner Urquell Brewery)"는 유명한 체코 맥주 버드와이저(Budweiser,체코어로 부드바이저)와 "필스너 맥주"가 생산되는 곳이며 넓고 아름다운 광장과 역사적 건물들이 많은 곳이다. 체코 프라하에는 "코무니스트 혁명 기념비(Memorial to the Victims of Communism)"가 있는데 이것은 소련의 통치로 인해 고통 받았던 사람들을 위한 기념비이다.

- 체코의 자연 경관

체코 엘베 강

체코 스위스 국립 공원(Ceske Svycarsko)은 독특한 바위, 계곡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보헤미안 스위스 국립 공원(Ceske Svycarsko)은 독일 국경에 위치하여 역사적 유적지들이 많은 곳이다. "카르로비 바리(Karlovy Vary)"는 온천과 자연이 어루어진 도시로 유명하며 "보헤미안 파라다이스(Cesky raj)"는 독특한 바위들과 고대 성들로 유명하다. 프라하에 있는 "비셰라드(Vysehrad)" 언덕과 주변의 공원은 조화를 잘 이루는 아름다운 관광지이며, "흐라드체크 크랄로베(Hradec Kralove)" 지역은 전통적인 농촌 마을과 숲으로 이루어졌다. 체코에는 리프노 호수(Lipno Lake)와 엘베 강(Elbe River)로 유명하다. 또한 마소프스카 산맥(Krkonos)과 제라의 산맥(Jizerske hory)등 다양한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나라이다.

 

 

체코는 다양한 고대와 중세 유적지, 국립공원, 자연 경관을 소유하여  풍부한 문화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나라이다. 오랜 세월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끝없이 저항해왔던 슬라브인들의 나라, 체코는 결국 프라하의 봄을 이루었으며 그 봄을 맞이한 이후부터 평화롭게 나라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