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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우크라이나, 체르노젬(검은 땅)의 나라

by 돌야dolya100 2024. 9. 20.

체르노젬, 검은 땅(Chernozem)의 나라, 우크라이나(Ukraine)의 이름은 역사적, 지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슬라브어"에서 유래한 합성어로서 "우(U)"는 변방을 뜻하고, "크라이(Kraine)"는 경계, 영토, 국경을 뜻한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는 "변방의 땅" 혹은 "경계 지역"이라는 의미이다. 우크라이나는 오랜 세월 러시아 제국,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 오스만 제국 등 여러 강대국의 경계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12~14세기경, 키이우 공국(Kievan Rus`)의 중심지였으며, 몽골 제국의 침략과 여러 분열을 겪으면서 주로 "경계 지역" 혹은 "변방의 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부터는 "우크라이나"라는 이 명칭은, 단순히 변방을 뜻하는 것에서 벗어나 "국가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독립국으로서의 자부심과 주권을 상징하는 의미로, "우크라이나" 명칭을 국가의 공식적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우크라이나, 이름은 단순한 지리적 개념을 넘어 오랜 세월 외세와의 경계에서 얻은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 이름이며 정식 명칭에 특별한 수식어나 왕조, 공화국 등의 부가적 단어가 없이 단순히 "우크라이나"로 불려진다. 우크라이나의 공식 언어는 동슬라브어 계통의 "우크라이나어(Ukainian)"이며 33개의 문자로 구성된 "키릴 문자"를 사용한다. 같은 슬라브어 계통의 폴란드, 체코어, 벨라루스어, 러시아어와 유사하며 문법과 어휘에는 차이가 있다.  

우크라이나 지도 우크라이나 검은 땅(Chernozem)

1.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도, 인구와 인종

-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수도

동유럽 평원에 위치한 우크라이나는, 영토 면적이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 총 면적이 약 603,500 제곱킬로미터이다. 우크라이나의 북쪽은 벨라루스, 남쪽은 흑해, 동쪽은 러시아, 서쪽은 폴란드와 헝가리, 서남쪽은 루마니아와 몰도바와 경계를 이룬다. 우크라이나의 땅은 대부분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체르노젬(흑토, 검은 땅)이라는 비옥한 토양을 자랑한다. 이 토양으로 인해 곡물 재배와 농업이 활발하여 주로 밀, 옥수수, 해바라기 등과 같은 농산물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세계의 "곡창지대"로 알려져 있다. 수도는 "키이우(Kyiv)"이며 2022년 기준, 인구는 약 280만명이 거주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면적은 약 839 제곱킬로미터이며 넓은 강과 숲, 아름다운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키이우를 2014년 이전에는 러시아어 발음인, 키예프(Kiev)로 불렀다. 키예프는 소련에 속했을때(소련 위성 국가) 불려졌던 이름으로서 서구권에서도 키예프라 불렀다. 그러나  2014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영어 발음의 "키이우"로 변경하였으며 국제적으로도 키이우로 알리고 있다. 

- 우크라이나의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약 4,100만명이며 이것은 유럽에서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에 속한다. 우크라이나의 민족 구성은 다 민족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중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인(Ukrainians)"이 전체 인구의 77%를 차지한다.  그외 소수 민족으로는 "러시아인(Russians)"이 17%, "폴라드인(Poles)"이 0.6%, "헝가리인(Hungarians)"이 0.3%, "루마니아인(Romanians)"이 0.3%, 타타르족(Tatars)과 유대인(Jews)이 0.2%를 차지한다. 우크라이나 또한 다문화 사회로서 다양한 민족과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2. 우크라이나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우크라이나의 역사

우크라이나 카르파티아 산맥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고대와 중세, 근대와 제국시대, 독립과 현대로 나누어 진다. 고대 우크라이나 땅에 정착한 사람들은 "스키타이족(B.C.8세기~A.D.1세기)"이며,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한 유목 민족이다. 스키타이족은 우크라이나 초원 지대와 동유럽 평원에 걸쳐 거주하였으며 뛰어난 전사들로 알려졌다.

1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는 "사르마트족(유목민)"들이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동유럽 평원에 정착하였다. 사르마트족은 유목 생활을 하였지만 사회적 구조가 잘 갖추어져 있었고 군대를 잘 운영하였다. 사르마트족이 동유럽 우크라이나 땅에 정착할 1세기에 게르만족의 일부도 우크라이나 땅에 일시적으로 정착하였다. 게르만족의 이동은 전 유럽으로 퍼졌고 우크라이나 지역에도 6세기까지 계속 이주가 이어졌다. 또한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다양한 문화적 교류도 이루어졌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고대 우크라이나에 정착하여 로마와 교류하였던 게르만족, 사르마트족, 스키타이족의 문화를 향해 "바르바로스 문화(Barbarian culture)"라고 불렀다. "바르바로스"는 "야만인"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바르바로이"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말을 로마인들은 다양한 민족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였다. 5세기에서 고대 슬라브 민족들(동슬라브민족)이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주로 농업과 무역에 종사였고 후에 키이우 공국의 기반이 된다. 또한 5세기 말에는 "하르살레족"과 같은 다른 유목 민족들이 동유럽 평원과 우크라이나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7세기부터 유럽에는 세 가지 귀족 계급이 등장하였는데 "보이아르(Boyar)", "공작(Duke)", "대공(Grand Duke)"이다. "보이아르"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계층을 형성한 귀족 집단을 말한다. 주로 키이우 공국과 키이우 공국 멸망 후 분열된 여러 공국(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모스크바 공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크림칸국, 헝가리 왕국 등)에서 귀족 계층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 보이아르들은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서 지도자 및 군대의 수장들이었다. "공작"은 왕국의 일부를 통치하거나 왕의 직속으로 중요한 사항들을 수행하는 귀족으로서 보이아르보다는 높다. "대공"은 왕국이나 대공국의 통치자를 말한다. 왕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상당한 권력을 가진 귀족 계급이었고  "공작"과 "보이아르" 보다는 더 높은 지위의 통치자로서 국가나 지역을 다스렸다. 따라서 왕은 국가 전체를 통치하였지만 대공은 국가의 어느 특정지역을 다스렸으며 그 공국 안에서 자치권을 가지며 왕의 지배 아래에서 맡은 공국을 통치하였다. "국가"는 정부, 법률, 국민을 갖추고 왕이 통치한다. "공국"은 군주제의 한 형태로서 왕보다는 낮은 지위에서 맡은 지역(지방)을 통치하였던 왕족(왕자, 공주) 통치 치역을 뜻한다. 따라서 공국은 국가의 일부로서 존재할 수도 있었고 독립적인 자치권과 주권을 가진 국가의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었는데, 대개의 경우 더 큰 국가의 일부로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7, 8세기의 우크라이나는 스키타이족, 사르마트족, 게르만족, 슬라브족, 사르살레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정착하면서 전쟁과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복잡한 상황을 맞게된다. 이러한 유목 민족들과 동슬라브 부족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문화적 변화와 정치적, 군사적 긴장감 속에서 "키이우 공국"이 형성 되었다. 9세기 초, 스칸디나비아 지역(현재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의 노르드족(바이킹, 노르만족의 선조)들이 동유럽 평원으로 이주하여 군사적 충돌과 상업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때 바이킹의 전사 중 "루리크(Rurik)"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지금의 러시아 북서부 지역의 "노브고로드"에 정착하여 정권을 잡고 862년에 "루리크 왕조"를 세웠다. 루리크는 영토 확장을 위하여 키이우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루리크의 후계자들(오레슬라프와 이그로르)은  동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시켜 나갔다. 882년, 루리크의 후계자이며 조카였던 "오레슬라프 대공(Oleg of Novgorod)"이, 키이우를 정복한 후 키이우를 중심으로 국가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키이우를 수도로 삼으면서 "키이우 공국"이 시작된다. 980년, "블라디미르 대공(Vladimir the Great;키이우 공국의 6대 대공)"은 공국을 강력하게 세워나갔으며, 988년 기독교를 공국의 종교로 채택하여 비잔티움 제국(동로마)과 관계를 강화하였다. 1019년, 야로슬라프 대공(Yaroslav the Wise;키이우 공국의 7대 대공)의 통치때는 법률을 개정하고 도시를 건설하고 발전시켰으며 정치와 문화도 더욱 발전하였다. 야로슬라프 대공의 죽음 이후, 그의 자녀들의 권력 다툼으로 인하여 동유럽의 여러 지역에는 여러 공국들이 세워졌다. 1149년, 모스크바 공국(12대 유리 돌고루키 대공이 건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Galicia-Volhynia;13세기초, 마지막 15대 대공 로만 므스타슬라비치가 건국~14세기초 멸망),  리투아니아 공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등 키이우 공국은 여러 지역으로 분열되었으며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의 손자였던 "바투 칸"이 동유럽을 침략하면서 1240년 "키이우 공국"은 멸망하게 된다. 키이우 공국 멸망 이후 우크라이나 땅에는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Galicia-Volhynia;13세기초 ~14세기초 멸망),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13세기 중반 건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1569년 건국), 모스크바 대공국(Grand Duchy of Moscow;15세기말 건국), 크림 칸국(Crimean Khanate;1441년 건국), 헝가리 왕국(Kingdom of Hungary;11세기~16세기), 폴란드 왕국(Kingdom of Poland;10세기 건국), 노브고로드 공국(Novgorod Republic;15세기 초 멸망) 등 여러 많은 공국들이 세워졌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연합되어 동유럽의 정치적 지형을 재편성하게 되었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계속적 성장과 강력한 중앙 집권적 체제를 구축함으로서 러시아 제국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여러 다른 공국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사회적 변화 가운데서 현대의 나라와 민족들로 발전해 왔다. 16세기와 17세기의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치를 받게됨으로서 우크라이나는 근대와 제국의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1569년 리투아니아 대공 국가와 폴란드 왕국이 연방을 결성하면서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게된다. 그로인해 우크라이나 "농민"과 "코사크"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귀족들과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렸던 농민들과 탈령병들이 우크라이나 남부, "자포로지예"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며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군대를 조직함으로서 무장 집단이 되었다. 코사크 집단은 "보흐단 흐멜니츠키"라는 강력한 지도자에 의하여 "자포로지 코사크 국가(Zaporozhian Cossack State)"를 세움으로서 주변국들과 복잡한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코사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치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1648년, 타타르족과 동맹을 맺고 "자단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한 후 우크라이나 지역을 장악하였다. 1654년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러시아와 "페레야슬라브"라는 동맹 협정(하멜니츠키 조약이라고도 함)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보호와 통치를 받게된다. 이로써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벗어났지만 결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의 "코사크" 집단은 러시아에 맞서 저항 운동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당시 코사크의 지도자였던 "스테판 라진(1670~1671년)"의 반란, 그리고 100년 후 "에멜리안 푸카초프(1773~1775년)"의 반란이, 연이어 실패하였고, 1775년, 러시아 제국이 "자포로지예"를 정복함으로서 "코사크 국가"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18세기 말, 우크라이나를 지배하였던 폴란트-리투아니아 연방은 여러 정치적 혼란과 외부의 침략으로 인하여 분할되었다. 이 분할 과정은 1772년에 한번, 1793년과 1795년에 차례로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동부는 러시아가 통치하게 되었고 우크라이나 서부는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이 통치하게 되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우크라이나 통치는 1918년 제 1차 세계 대전까지 지속되었고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되어 1918년 11월 1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식적으로 해체됨으로서 우크라이나의 통치도 끝나게 되었다. 18세기 말까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에 의해 완전히 정복 당하였고 여러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져 지배를 받게된다. 우크라이나 농민들 대부분은 러시아의 지주들에게 소작농으로 살아가며 착취를 당하였다. 1861년, 농노 해방령이 선언되었지만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여전히 가난과 착취로 인해 고통 당했다.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의 문화와 언어를 강요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19세기 중반부터 우크라이나는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문학, 역사, 음악 등 문화적 힘을 등에 업고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19세기 중반(1830~1840년대)에도 농민들의 반란과 멸망하였던 코사크의 저항이 다시 전개되었다. 이러한 반란과 민족주의 저항이 1905년 1월 2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러시아 혁명(피의 일요일)"을 통해 우크라이나에서도 농민, 노동자, 지식인들이 자치권을 요구하는,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그로인하여 민족주의 운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1905년에 발생한 이 혁명은 러시아 제국 내에서 사회적, 정치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저항과 혁명은 우크라이나 독립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20세기 초, 1917년, 러시아에서는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통치에 대한 반발로 2월과 10월에 두 번의 혁명이 일어났다.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는 전제 정치가 끝나게되고 임시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10월 혁명으로 볼세비키 당이 레닌의 지도아래,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서 1922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이 탄생한다. 이러한 러시아 혁명을 틈타서 우크라이나는 키이우에서 국민 의회(Rada,라다)가 결성되었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다음해인 1918년 10월, 우크라이나의 우크라이나 국민의회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로 갈라진채, 내부 분열로 인하여 내전이 발생하였고 외부의 침략(폴란드, 소련)도 받게된다.

1919년, 폴란드와의 전투로 인하여 우크라이나의 영토는 더욱 분열되었고 1920년 소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종말을 맞게된다. 다음해인 1921년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고 1922년부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어 소련의 중요한 농업, 산업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32년부터 시행된, 스탈린 정권의 강제 집단 농장화 정책으로 우크라이나는 가난과 착취에 시달렸으며 그 해에 일어난 대규모 "기근(홀로도모르;Holodomor)" 속에서 수백만명이 굶어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련의 통치속에서 우크라이나는 빠르게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되었지만 정치적 억압과 강제 이주와 같은 만행을 견디어야 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함으로서 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였고 1941년, 러시아를 침략함으로서 지정학적 중요 위치에 있었던 우크라이나는 전장의 중심이 되었다. 그로인해 수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1945년 5월 7일, 독일이 항복함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소련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서방과 경계선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정치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갈등과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 기회를 우크라이나는 놓치지 않고 독립을 요구하였고, 소련의 붕괴가 가속화됨으로서 우크라이나는 1991년 8월 24일,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그해 12월 독립 투표 결과 대다수의 우크라이나 인들이 독립을 지지하였다. 같은 시기 소련을 구성하였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앞을 다투어 독립을 선언함으로서 1991년 12월 26일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일은 1991년 8월 24일이며 1991년 12월 1일은 우크라이나 독립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날로 기념하고 있다. 독립 후, 우크라이나는 새 헌법을 채택하고 자주적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와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2014년 2월, 서방과 연합을 시도하려는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에 러시아는 군대를 보내 "크림 반도의 합병"을 주장하였고 여기에 대하여 서방은 불법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동부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에서 친 러시아 세력이 무장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요구하였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서방의 지원을 받으면서 반군들과 수년간 전쟁을 지속하였다. 그러다가 2022년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대대적으로 침략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2024년 9월 20일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 우크라이나의 정치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우크라이나의 정치 체제는 대통령제와 의회제가 결합된 형태이다. 대통령은 국가의 수반이며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외교 정책, 국가 안보, 군사에 대한 권한을 가진다. "베르호브나 라다(Verkhovna Rada)"로 불리는 의회는 단원제이며 의원들은 법안을 제정하고 정부를 감시한다. 정당체제는 다당제로서 여러 정당이 활동하며 친 러시아 세력과 친 서방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부패와 경제문제, 지역간의 긴장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 우크라이나는 유럽 연합과 NATO와 관계 강화를 추구함으로서 안보와 경제 발전을 추구하려 하지만 이런 점은 러시아를 자극하고 러시아와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 우크라이나 경제

2023년 기준, 우크라이나의 GDP는 19.6억 달러이며 전세계의 132위 경제 규모에 해당한다.  우크라이나 경제는 농업, 산업, 서비스 분야 등 다양하게 구성되며 특히 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유럽에서 면적이 가장 큰 우크라이나(약603,500제곱킬로미터의 면적)는 지리적 특성상 구릉지대와 대량의 농사에 알맞는 비옥한 평야가 많다. 이러한 비옥한 토양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전통적 농업 국가로서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세계적 곡물 생산국이며 수출국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품목은 밀, 보리, 해바라기, 옥수수 등이며, 우크라이나가 농업 강국이 된 것은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토지 "체르노젬(Chernozem,검은 땅)" 때문이다. "검은 토양"의 뜻인 체르노젬은 곡물 생산에 매우 유용한 유기물이 풍부한 흙으로서 질소, 인, 칼륨 등 풍부한 영양소를 공급하여 작물의 성장에 큰 몫이되며 풍성한 농업 생산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검은 땅(체르노젬)은 우크라이나 뿐 아니라 몰도바, 러시아, 카자흐스탄, 루마니아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분포하여 농업 생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체르노젬은 수분 유지력도 뛰어나다. 많은 유기물, 미네랄, 점토로 인하여 토양이 수분을 잘 보관하며 그로인해 가뭄에 강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체르노젬은 미세한 입자와 점토, 모래로 구성되어 유기물층이 두껍게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농업은 우크라이나 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광물 자원이 풍부하여 석탄, 철광석 등 광업이 발달되어 있으며 그로인하여 철강 산업, 기계 산업, 중공업 등이 주요 산업으로서 철강과 기계를 생산하고 수출한다. 그리고 작은 규모이지만 IT와 금융과 같은 서비스 산업도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계속되는 갈등과 전쟁으로 국토와 경제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타격을 입었다. 2024년 현재,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는 IMF,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 기구와 국제 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 경제 회복을 추진하려 노력 중이다.  

- 우크라이나의 교육

우크라이나의 교육 체계는 다양한 교육 제도를 가지고 있다. 3세에서 6세까지 유치원 교육을 통해 교육의 기초를 다진다. 초등학교는 1학년에서 4학년까지이며 읽기, 쓰기, 수학, 자연, 과학 등을 배운다. 중학교는 5학년부터 9학년까지이며 일반적으로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으로 진행된다. 중학교 과정에서 여러 과목을 배우고 직업 교육을 받거나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결정한다. 고등학교는 10학년부터 11학년까지이며 대학 진학을 준비한다. 대학은 국가가 시행하는 시험을 통해 입학 자격을 얻게된다. 우크라이나의 고등 교육, 대학에는 여러 국립 대학과 사립 대학교들이 있으며 학사, 석사, 박사 과정으로 진행된다. 전문 대학은 취업을 위한 기술 교육을 중심으로 실무 위주의 교육이 진행된다. 우크라이나의 중요한 대학에는 키이우 국립 대학교(Taras Shevchenko National University of Kyiv), 하르키우 국립 대학교(V. N. Karazin Kharkiv National University), 오데사 국립 대학교(Odesa I. I. Mechnikov National University), 리비우 국립 대학교(Ivan Franko National University of Lviv), 키이우 대학교의 경제학부(Kyiv School of Economics), 플타바 국립 대학교(Poltava National Technical Yuri Kondratyuk University), 하르키우 항공 대학교(National Aerospace University-Kharkiv Aviation Institute) 등이 있다. 2024년 현재, 전쟁이 지속되는 우크라이나의 교육 상황은 많은 학교의 파괴로 인하여 교육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교육의 기회도 불분명해졌다. 

 

3. 우크라이나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우크라이나의 유적지

우크라이나 드니프르 강

11세기에 건축된 키이우 성 소피아 대성당(St. Sophia Cathedral)은 비잔틴 건축 양식으로서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특징이며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11세기에 건축된 키이우의 페체르스크 라브라(Kyiv Pechersk Lavra) 수도원은 정교회 성당이며, 리비우의 "역사 지구"에는 중세와 근대 건축물이 잘 보관되어 있다. 17세기에 건축된 차르니히우의 성 바실리 대성당(St. Basil`s Cathedral), 흑해의 우즈호르드에 위치한 소치스카(Sofiyivka Park)는 아름다운 공원으로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며 오데사 항구 도시는 19세기 건축물과 문화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고대 유적지들이 많은 하르키우 지역의 카르코로믹(Karkhiv), 흑해연안 크림반도와 가까운 타만 반도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유적이 보존된 곳이다.

- 우크라이나의 자연 경관

동유럽의 광활한 검은 땅의 우크라이나는 아름다운 산, 강, 평야, 호수 등 넓은 땅 만큼 다양한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우크라이나 전역은 검은 땅(체르노젬,Chernozem)으로 되어 있다. 이 땅은 농업에 적합한 비옥한 땅이며 풍성한 농경지를 제공한다. 우크라이나 서부에는 카르파티아산맥(Carpathian Mountains)이 있다. 이곳은 아름다운 경치, 풍부한 생태계가 잘 보존된 곳으로서 다양한 야생 동물을 관찰 할 수 있으며 스키, 하이킹을 할 수 있는 스포츠 관광지로 유명하다. 우크라이나 남부의 오데사에는 검은 바다(Black Sea)가 있고 해안선과 해변을 따라 여러 도시들이 아름답게 들어서 있다.  우크라이나 중앙에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긴, 드니프르 강(Dnieper River)이 있다. 우크라이나 남부에는 푹과리야 강(Pivdenny Buh River)이 있다. 이곳은 아름다운 강으로 인해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우크라이나 서부에는 풍성한 생태계가 잘 보존된 훌라니카 보호구역(Huljanytsia)이 있으며,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는 도시 경관을 즐길 수 있는 그레쉬코프 공원과 나이키프 공원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각 지역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지닌 명소들이 있지만 2024년 현재, 전쟁으로인하여 파괴가 심각하다.

우크라이나 흑해의 오데사의 검은 바다 우크라이나 흑해의 오데사 항구도시

 

2024년 현재, 검은 땅의 나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갈등과 전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여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지속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강한 저항의지를 보이며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동시에 러시아의 공격으로 파괴된 도시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재건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경제 회복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충격은 여전히 심각하며 앞으로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