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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아일랜드, 신화와 전설의 나라

by 돌야dolya100 2024. 10. 2.

신화와 전설의 나라, 아일랜드의 정식 국가 명칭은 아일랜드 공화국(Republic of Ireland)이며, 이것은 아일랜드를 의미하는 고대 게일어(켈트족언어) "에라(Eire)"에서 유래하였으며, "에라"는 고대 게일어 "에리우(Eiru)"에서 유래하다. 에라는 고대 켈트족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으로서 아일랜드 사람들은 아일랜드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고 있다. 에라 여신은 농경, 대지 대지와 관련된 신이며 농작물과 가축의 번영을 관장하는 풍요의 여신이다. 로마 제국은 아일랜드를, 겨울을 의미하는 히베르니아(Hibernia)로 불렀는데 그것은 아일랜드가 겨울이 되면 무척 추웠기 때문이다. 1169년, 잉글랜드가 아일랜드를 정복함으로서 영어가 아일랜드에 들어가게 되어, "에라(Eire)"를 고대 영어로는 "아이얼란드(Iernande)"로 불렀으며 이것이 중세에는 Ireland로 변형되어 지금까지 아일랜드를 나타내는 정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에라(Eire)"는 아일랜드의 헌법에서 사용되는 아일랜드의 공식적 국명이며 주로 게일어를 사용하는 문맥에서 사용된다. 반면 Irelan는 국제적으로 널리 사용되며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 아일랜드 전체를 포함할때 사용하는 이름이다. 

아일랜드의 언어는 아일랜드의 고유한 언어인 "게일어(Gaeilc)"와 "영어"가 주로 사용된다. 게일어는 아일랜드 헌법에 명시된 아일랜드의 공식 언어이며 EU의 24개 공식 언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면 19세기 이후 영어 사용이 증가하면서 게일어 사용이 감소하였고 영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1. 아일랜드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아일랜드의 영토와 수도

아일랜드 지도

아일랜드는 유럽의 북서쪽에 있는 섬나라이며 정치적 독립 국가인 "아일랜드 공화국(Republic of Ireland)"과 영국의 일부분으로 남은 "북 아일랜드(Northern Ireland)"로 이루어졌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면적은 약 70,273 제곱킬로미터, 북 아일랜드 면적은 14,139 제곱킬로미터로서 이를 합친 전체 면적은 84,421 제곱킬로미터이다. 이것은 유럽에서 그린란드(Greenland, 2,166,086 제곱킬로미터)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섬이다. 아일랜드 섬 구조는 서쪽은 대서양, 북쪽은 북아일랜드와 접하고, 동쪽은 아일랜드와, 남쪽은 켈트해와 접한다. 아일랜드는 여러 산맥과 평원, 강과 호수, 해안선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높은 산맥은 "맥길리 쿨리(MacGillycuddy`s Reeks)"이며 이곳에는 아일래드에서 가장 높은 해발 1,038m의 "카라운 툴라(Carrauntoohil)" 산이 있다. 아일랜드의 중앙 지역은 평원으로 되어있어 농경에 적합한 환경이며, 강과 호수도 많으며 약 7,500 제곱킬로미터의 해안선은 다양한 절벽, 만, 해변으로 이루어졌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수도는 "더블린(Dublin)"이며 인구는 2023년 기준, 150만명 정도로서 아일랜드 전체 인구의 28%가 살고 있다.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가장 큰 도시이며 최근 이민자의 증가로 인해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북 아일랜드"의 수도는 항구도시 벨파스트(Belfast)이며 2023년 기준, 64만명 정도가 거주한다.

- 아일랜드의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아일랜드 공화국의 인구는 총 520만명이며, 북 아일랜드는 190만명 정도, 이를 합치면 약 710만명 정도이다. 아일랜드는 전통적 단일 민족으로서 대다수 인구가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비율을 보면, 아일랜드인 85~90% 정도, 잉글랜드인 2~3%, 폴라드인 2~3%, 그외 리투아니아인, 니제르인, 루마니아인, 아프리카계, 아시아계를 합한 다양한 민족들이 5~10%정도를 차지한다.

 

2. 아일랜드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아일랜드의 역사

아일랜드의 역사는 수천년에 걸쳐있으며 고대와 중세시대, 노르만 정복시대, 잉글랜드의 통치와 독립전쟁시대, 내전과 현대로 나눌수 있다. 아일랜드에는 B.C. 3,200년경에 만들어진 거대한 고분 "뉴그레인지(Newgrange)"가 있다. 이로보아 이미 그 시대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B.C.600년과 500년경, 켈트족이 아일랜드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정착함으로서 고대 아일랜드 사회를 이루었다. 이들은 B.C.4세기까지, 복잡한 신화를 만들어 냈으며 예술을 발전시켰고 여러 부족들과 갈등과 전투를 통해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켈트족은 여러 다양한 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부족은 독립적 지배 구조로서 영웅적 인물로 숭배받았던 왕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부족 국가 형태였다. 켈트족은 전사를 중요시하였고 "드루이드(Druids)"라는 왕 다음의 두번째 제사장 계급이 부족을 이끌면서 종교적 의식(다신교), 교육, 정치, 법률의 중심에 있었다. 드루이드는 왕, 드루이드, 귀족,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을 만들어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였고 재산, 결혼, 형벌에 관한 규범도 만들었는데 이것을 "브레혼 법(Brehon Law)"이라한다. 드루이드는 이러한  켈트족의 역사와 전통을 구술로 보존하고 전하는 지식적 그룹으로서 수학, 의학, 천문학, 법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드루이드는 왕에게 정치적 조언자 역할도 하였으며 법률과 도덕적 규칙도 정하였다. 아일랜드는 신화와 전설의 나라 답게, 많은 신화와 전설이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투어허 데 나난(Tuatha De Danann)"이다. "투어허 데 나난"은  "데나의 자손"이란 뜻으로서 고대 아일랜드, 원주민의 한 부족으로 여겨진다. 투어허 데 나난은 농업, 의학, 예술,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초능력을 가진 집단으로 여겨지며 이들을 영웅화 시킨 신화이다. 이들은 다른 악한 부족들 특히 어둠과 혼란, 악을 상징하는 "포모르인(Fomorians)"과의 여러번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아일랜드를 지배하였다고 전해진다. 포모르인은 신의 후손들로서 고대 바다의 정령이었으며 악의 힘을 가지고 세상을 혼란스럽게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포모르인과 투어허 데 나난의 전투 중 모이르네 전투(Moira Battle)는 가장 치열한 두 집단간의 전투로 알려져있으며 이 전투에서 승리한 투어허 데 나난이 결국 아일랜드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피어나 전설(Pearl of the West)도 유명한 민족이야기로 전해지는데 주인공인 피어나(Pearl)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여성으로서 사랑, 운명, 희생과 같은 주제를 탐구한다. 그리고 영웅, 쿠 훌린(Cu Chulainn)의 이야기도 유명한 신화중 하나이다. 쿠 훌린은 올스터 왕국(Kingdom of Ulster)의 왕 콘호르 맥 네사(Conochbar mac Nessa)의 조카로서 혼자 적군과 여러번 싸우며 왕국을 방어한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드루이드"의 신화는 주로 동물, 계절의 변화와 관련된 자연적 주제들로 이루어졌으며 후에 아일랜드의 문확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현대의 여러 판타지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이 드루이드를 지혜와 예언의 상징이라 표현하였다. 드루이드는  로마의 제국 확장에 따라 점차 사라졌다. B.C.1세기, 로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명령으로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장군이 4만의 군대로 브리튼 섬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정복하지 않고 군사적 압박만 가하였다. 로마는 금과 은 같은 천연 자원이 풍부한 아일랜드와 상업적으로 연결되어 로마의 영향권에 놓이게 되었지만, 로마의 군사적 진출에 대한 저항은 막강하였다. 로마는 아일랜드의 지리적 요건으로 인하여 직접적으로 정복하지 못하였지만 아일랜드 귀족들은 로마의 문화와 정치적 체제를 받아들였으며 그로인해 상업적 관습과 다양한 기술들이 아일랜드 사회에 도입되었다. 4세기 중반까지, 로마는 내부의 갈등과 내전, 외부의 침략으로 점점 쇠퇴하였으며 그로인하여 아일랜드와의 연결도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432년, 패트릭(Patrick)에 의해 아일랜드에 기독교가 전파됨으로서 기독교와 켈트족 종교가 충돌하고 융합되면서 아일랜드는 기독교로 전환되었다. 이 영향으로 아일랜드는 켈트족의 전통과 결합된 독특한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여러 수도원들이 세워졌다. 6세기의 아일랜드는 영국, 프랑스 등 대륙과 해양 무역을 활발하게 하였으며 "브랜단의 항해(The Voyage of St. Brendan)"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브랜단은 항해자이며 탐험가로서 신비의 섬을 찾기 위해 대서양을 항해하는 내용이다. 항해와 탐험을 하면서 천사 및 신성한 존재와의 만남을 경험하였고 신비한 생물들을 경험하였다고 전해진다. 7세기 아일랜드는 수도원 중심으로 문화와 학문과 사회가 발전하였던 수도원 문화의 황금기였다. 수도사들이 필사한 많은 고대 문헌들로 인해 이곳은 유럽의 학문적 중심지가 되었다. 수도사들은 헬라어, 라틴어 등 다양한 언어를 연구하였고, 고전 문학과 성경을 연구함으로서 아일랜드는 "학자의 섬"으로 알려졌다. 이때 필사된 "켈스의 서(Book of Kells)"는 대표적 경전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네 복음서로 이루어진 고대의 책이다. 또한 글렌달로크(Glendalough), 케이힐(Kells), 아르마(Armagh)와 같은 수도원들은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7세기의 아일랜드는 여러 작은 부족들이 부족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왕국들은 올스터 왕국(Ulster), 레인스터 왕국(Leinster), 미스 왕국(Meath), 코노트 왕국(Connacht), 돈갈 왕국(Donegal) 등이 있었다. 몇몇은 자칭 아일랜드 대왕(High King of Ireland)으로 자처하였으며 이때까지 타라 언덕(Hill of Tara)에서는 부족 혹은 왕들의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이들 부족들은 서로 동맹과 전투를 병행하면서 아일랜드에서의 지배권을 얻으려고 경쟁하였다.

아일랜드 타라 언덕의 왕들 회의

795년, 노르드 족의 바이킹들이 아일랜드 스케리브(Skerries) 지역의 수도원들을 공격함으로서 바이킹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800년대 초, 아일랜드의 여러 수도원들이 반복적으로 계속 침략과 약탈을 당하였고 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약탈을 당하였다. 841년, 바이킹들은 좀더 조직화되어 더블린(Dublin), 워터포드(Waterford), 리머릭(Limerick) 등 여러 정착지(도시)를 세워 거점을 삼고 내륙 깊숙히 침략과 약탈을 시도하려 하였다. 이러한 바이킹의 약탈과 침략은 9세기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아일랜드의 왕국들, 특히 올스터 왕국과 레인스터 왕국간의 내전으로 인해 더욱 많은 지역들을 바이킹에게 내주어야 했다. 1014년 바이킹과 아일랜드 왕국 간의 결정적 전투가 벌어졌는데 클론타프 전투(Battle of Clontarf)에서 아일랜드가 승리(브리안 보루 왕, Brian Boru)함으로서 바이킹들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바이킹의 침략은 11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많은 바이킹들이 아일랜드에 정착하게 됨으로서 더블린, 워터포드와 같은 도시들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 아일랜드 왕국들은 연합과 동맹을 형성해 가면서 중앙 권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왕국의 통합을 시도하려 하였으며 특히 마오리 가문(O`Brien)과 맥네일 가문(MacNeill)이 통합을 시도하여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왕국은 쉽게 통일되지 못했고 여러 왕국들은 서로 경쟁하며 전투를 치루며 대립하였으며 밖으로는 바이킹의 침략과 약탈도 겪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1169년, 컨노트 왕국(Connacht)의 마지막 왕이었던 로드리크 맥레리(Roderic O`Connor)는 외부의 지원이 절실하여 웨일스 출신이며, 노르만족의 귀족이었던 리처드 데 클레어(Richard de Clare, "Strongbow")와 동맹을 맺고 아일랜드로의 진격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아일랜드에 노르만의 군대가 상륙하여 침략 전쟁을 벌였으며 그 결과 아일랜드 전역에 노르만 왕국들이 형성되었다. 더블린 왕국(Kingdom of Dublin)은 9세기 후반, 바이킹이 세웠지만 노르만의 정복 이후 더욱 강력해졌다. 아일랜드 켈트족이 세웠던 레인스터 왕국(Kingdom of Leinster) 또한 노르만의 침략으로 정복당한 후 리처드 데 클레어가 통치하는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그 외에도 켈트족의 울스터 왕국(Kingdom of Ulster), 코노트 왕국(Kingdom of Connacht) 등 여러 왕국들이 노르만에게 정복 당함으로서 아일랜드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171년, 노르만의 리처드 데 클레어를 아일랜드로 끌여들였던 컨노트 왕국의 로드리크 맥레리 왕 또한 노르만의 군대와 전투(더블린 전투)를 치루었는데 그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서 왕권을 잃게된다. 13세기의 노르만은 아일랜드 전역을 거의 지배하였다. 특히 1200년대 초, 더블린, 코크, 웨익스포드와 같은 주요 도시들은 노르만의 중심지가 되었다. 1260년대, 아일랜드의 귀족들이 노르만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세일리 봉기)를 일으켜 아일랜드 중부에서 "포트나 매리 전투(Battle of Fortnath Mair)"를 치루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의 노르만족, 지배는 계속되었으며 13세기 중반 이후, 노르만의 법률 체계가 도입되면서 아일랜드의 법률과 관습에 변화가 일어났다. 14세기 중반, 흑사병(Black Death)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나감으로서 아일랜드에서도 2만에서 5만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왔고 이로인하여 당시 인구의 약 30~50%가 감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시기,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귀족이었던  제프리 리(Geoffrey de Geneville)가 아일랜드로 이주하여 노르만 지배에 참여하여 더블린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정치적 지배자로 활동하게 된다. 제르리 리가 이끄는 노르만 군대와 아일랜드 귀족들은 몇차례 소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제프리 리가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아일랜드의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제프리 리, 이후 15세기 초, 아일랜드는 전통 귀족 가문이었던 오닐(O` Nell)과 오도널(O`Donnell) 같은 귀족들을 중심으로 여러차례 저항과 전투가 있었지만 노르만을 꺾지는 못하였으며 오히려 내전과 지역 분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오닐 가문은 울스터 지역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가문이며 토마스(Tomas) 오닐과 같은 유명한 지도자를 배출한 가문이다.  

오도널 가문은 아일랜드 서부 리피 및 도니골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가문이다. 이 두 가문은 아일랜드 내전과 여러 전투에서 협력하며 경쟁하면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1509~1547년 통치)는 아일랜드를 잉글랜드 왕국으로 통합하려 시도하여 종교와 법률과 관습을 아일랜드에 강요하였다. 당시 헨리 8세는 카톨릭 교회로부터 잉글랜드 종교를 독립하여 국교회(성공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그 종교를 아일랜드에게도 강요하여 전통적 카톨릭 귀족들이 가진 토지와 권한을 잉글랜드 중앙 정부가 통제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541년 헨리 8세는 공식적으로 아일랜드 왕이라 선언하여 아일랜드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려 하였다. 여기에 대해 오닐 가문과 오도널 가문은 헨리 8세에 맞서 저항하였다. 그러나 1542년, 헨리 8세는 콘 오닐(Conn O`Neill)과 아일랜드 귀족들을 잉글랜드 왕실의 지배아래 두기 위하여 "항복 및 재수여(Surrender and Regrant)" 정책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일단 아일랜드 귀족들이 항복하고 난 후 나중에 잉글랜드 왕으로부터 백작(Earl of Tyrone) 칭호와 영지 소유권을 받는 봉건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서 아일랜드 귀족들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게 된다. 16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아일랜드에 영국 국교회를 강요했으나 아일랜드는 카톨릭 신앙을 지키려 하였다. 엘리자 베스 여왕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식민지화를 통해 아일랜드를 억제하려 하였고 여기에 아일랜드는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아일랜드 귀족 가문이었던 타이론의 오닐(Earl of Tyrone)로도 알려진 휴 오닐(Hugh O`Neill)과 휴 로리(O`Donnell)가 스페인의 지원을 받으면서 엘리자베스의 잉글랜드 군대와 맞서 싸웠다. 1601년, 킬메시 전투(Battle of Kinsale)에서 오닐은 결정적으로 패배하였고 1603년, 멜리폰트 조약(Treaty of Mellifont)으로 끝나게 된다. 이 전쟁은 1594년부터 1603년까지 약 8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타이론 전쟁이라 한다. 타이론 전쟁의 결과 휴 오닐과 휴 로리 등 90명의 아일랜드 귀족들은 아일랜드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졌다. 따라서 1607년, 루터켄선(Lough Swilly)에서 배를 타고 스페인이나 다른 유럽 국가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로서 아일랜드에서의 카톨릭 귀족 사회는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고 귀족들이 떠난 "우스터 지역"은 잉글랜드 정착민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1642년, 찰스 1세의 통치로 잉글랜드는 왕당파와 의회파가 충돌하여 내전(1642~1651년)으로 이어졌고 의회파의 강력한 지도자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장군이었다. 내전은 크롬웰 장군이 이끄는 의회파의 승리로 찰스 1세는 1649년,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잉글랜드는 공화국(Commonwealth)으로, 크롬웰 장군은 호국경(Lord Protector, 1653~1658년)의 직위에 올라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1649년부터 1653년까지, 크롬웰 장군은 아일랜드 정복길에 올랐다. 드로게다(Drogheda)와 웩스퍼드(Wexford)에서 잉글랜드 군은 수천명의 아일랜드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아일랜드를 정복한 크롬웰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수립하였으며 강력한 정치력으로 나라를 통치하였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자, 공화국은 다시 해체되고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즉위하면서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1688년, 잉글랜드에서는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 일어났다. 카톨릭 신자였던 제임스 2세는 군대와 공직자들의 중요한 자리에 많은 카톨릭 신자들을 임명하고 왕권을 강화하였고, 이러한 제임스 2세를 개신교 신자들은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도들은 윌리엄 오프 오렌지(William of Orange)를 통해 제임스 2세를 축출하려 하였다. 1688년 11월, 윌리엄 오프 오렌지는 네델란드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진입하였고 제임스 2세는 미리 도주함으로서 별다른 전쟁없이 1689년, 윌리엄 오프 오렌지(윌리엄 3세)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2세와 결혼 후 함께 공동으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즉위하였다. 왕이된 윌리엄은  영국 헌장(Bill of Rights)을 통과시켜 왕권을 약화시키고 의회권을 강화하였다. 1690년 7월 1일, 도주하였던 제임스 2세가 왕권을 되찾기 위하여 카톨릭의 지지속에 군대를 몰고 아일랜드로 돌아오게 되었고 개신교 군주였던 윌리엄 3세는 이를 막기 위하여 아일랜드의 보이네 강 근처에서 대규모 전투(보이니 전투, Battle of the Boyne)를 벌여 승리하였다. 이 전쟁 후 아일랜드의 카톨릭 귀족들과 군인들은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는데 이것을 Flight of the Wild Geese라 한다. 보이니 전투 후 1691년 10월 3일, 제임스 2세의 지지 세력과 윌리엄 3세 사이에 리머릭 조약(Treaty of Limerick)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카톨릭 신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종교적 관용이 약속된 조약이었지만 잉글랜드 의회는 이것을 무시하고 카톨릭 탄압법(Penal Laws)을 제정하여 카톨릭 신자들의 재산 소유 금지, 토지 소유 금지, 공직 진출 금지, 교육 제한 등 정치적, 경제적,사회적으로 고립을 시키려 하였다. 이것은 19세기 동안 지속되어 개신교 소수의 귀족들이 부와 권력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차별은 결국 18세기 후반부터 일어난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의 배경이되었다. 1700년대 초반,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의회의 지배를 받게되었고 불만이 극에 달한 아일랜드는 독립에 대한 정치적 요구와 저항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이 시기 아일랜드의 경제는 농업 중심에서 산업화로 전환되는 과정이었고 1740년대에 일어난 기후 변화와 대 기근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민족주의가 음악, 문학을 통해 표출됨으로서 문화적 부흥기를 맞기도 하였다.  1719년, 아일랜드 의회는 카톨릭 신자들의 권리에 대한 "탄압 법안"을 17세기에 이어 또다시 통과시켰다. 이것은 아일랜드 유니언당(United Irishmen)과 같은 비밀 조직이 결성되게 하였고 1798년, 카톨릭 신자들의 봉기(Irish Rebellion of 1798)로 이어져 정치적 독립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798년, 5월 아일랜드 유니언 당은 여러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위클로(Wicklow)와 울스터(Ulster) 지역에서는 전투가 벌어졌지만 실패하였다. 그리고 1798년 6월 머시 전투(Battle of Vinegar Hill)에서 또다시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유니언당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1801년 1월 1일 아일랜드 의회가 해산되고 잉글랜드 의회로 통합되는 유니온 조약(Act of Union)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는 그레이크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형성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하여 아일랜드의 민족주의는 더욱 저항 의식이 강해졌으며 정치적 독립을 위해 운동을 시작함으로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1845년부터 1852년까지 약 100만명이 굶어죽는 대 기근이 발생하였고 이 기근을 피하여 100만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나게 된다. 이 기근을 감자 기근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아일랜드 농민들의 식량이었던 감자에 곰팡이 균이 퍼지면서 대규모 식량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잉글랜드 정부는 이 대 기근에 대하여 아일랜드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정책을 내 놓지 못하였고 이것은 민족주의 운동의 전환점이 되어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1879년, 아일랜드 농민들 사이에서 안정적 임대 조건, 토지 소유권, 공정한 지대를 요구하는 농민 운동(Irish Land League)이 일어났으며 이 운동은 찰스 스튜어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과 같은 지도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찰스 스튜어트 파넬은 1880년에 아일랜드 의회에 선출되어 아일랜드 자치 정부를 위하여 활동하였으며 아일랜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아일랜드의 정치적 독립과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881년, 토지법(Land Act of 1881) 제정을 이끌어내어 농민들의 권리를 인정받게되었고 지대 인하를 위하여 법적 장치도 마련되었다.

찰스 스튜어트 파넬은 1886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자치 법안을 잉글랜드 이회에 제출하였지만 통과되지 않았다. 1890년대의 아일랜드는 자치와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아일랜드 민족당(Irish Parliamentary Party)은 아일랜드 자치 정부를 위해 활동을 하였다. 이시기에 또한 아일랜드 사회주의 운동도 점차 확산되어 노동자들의 권리와 사회적 평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1차 세계 대전 중 아일랜드의 정치적 불만이 극에 달하여 결국 이스터 봉기(Easter Rising)로 이어졌다. 이 봉기는 1916년 4월 24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민족주의 자들 즉 파넬의 아일랜드 민족당과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지도와 조직아래 잉글랜드에 대항하였던 무장 봉기이다. 이들은 더블린의 주요 건물을 정렴하여 국민들에게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잉글랜드는 군대를 파견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결국 4월 29일 봉기가 일어난지 5일만에 진압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고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이 봉기를 통해 아일랜드는 독립을 위한 무장 저항을 더욱 강하게 이어갔다. 1917년, 아일랜드 공화국 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은 무장 투쟁을 선언하여 게릴라 전술로 잉글랜드 군대와 경찰을 공격하였다.  1919년 1월 21일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첫 공격과 첫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몇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1918년 아일랜드 민족당이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독립의 요구는 더욱 강해졌다. 아일랜드 공화국 군의 계속되는 무장 투쟁으로 인해 1921년 잉글랜드 - 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독립 투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아일랜드는 자치권을 부여 받았고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 1922년)이 설립되었다. 이로써 아일랜드는 자유국이 되었고 프로테스탄트가 많았던 북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분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 조약은 아일랜드 안에서 찬반이 엇갈려 아일랜드 내전(Irish Civil War)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조약이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였던 반대하는 세력과,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내에서 정부를 수립하려는 목적으로 지지하였던 세력 간의 다툼으로서 반대 세력을 "반역자들"이라 낙인 찍기도 하였다. 내전은 1922년 6월 28일 더블린의 포스트 오피스에서 처음으로 전투가 벌어져, 1년 동안 계속 되었다. 결국 조약을 지지했던 세력들의 승리로 1923년 5월 24일 내전이 종결된다. 1939년부터 1945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지만 아일랜드는 중립을 유지하여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외교적으로 더 많은 독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1937년, 아일랜드는 "Bunreacht na hEireann"의 새 헌법을 제정하여 국가의 기본 원칙을 세웠다. 이 헌법에서 아일랜드의 공식 명칭을 에라(Eire)로 수정하여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1949년 4월 18일 아일랜드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연방에서 탈퇴하고 공식적 공화국으로 선언하였다.  1973년, 유럽 공동체(EU)에 가입함으로서 경제가 크게 성장하였으며 농업에서 선비스 산업으로의 전환도 이루어 졌다. 1960년대부터 북 아일랜드에서 "더 트러블스(The Troubles)"라는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다. 잉글랜드계 프로테스탄트였던 북아일랜드에서 카톨릭계였던 소수의 아일랜드계가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카톨릭계의 시민권을 요구하며 차별에 대한 평화적 시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68년, Derry에서 시위도중 경찰과 시민들의 충돌로 폭력사태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긴장은 1972년 1월 30일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사건으로 이어진다. 이날 영국 군대가 카톨릭 운동가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여 여러명이 사망하게 되었고 이것은 북 아일랜드의 폭력 사태를 증폭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무장 투쟁을 강화함으로 수천명이 사망하고 부상당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1998년 4월 10일 벨파스트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이 체결될때까지 폭력과 무장 저항은 계속되었다. 북 아일랜드의 내전 "더 트러블스(The Troubles)"를 종결시키기 위하여 벨파스트 평화 협정을 맺게된다. 이 협정으로 북 아일랜드는 의회를 구성하고 자치 정부가 설립되었으며 이 협정으로 아일랜드계와 잉글랜드계의 차별을 없애는 조치들이 발표되었고 모든 주민의 평화로운 공존과 인권을 보장하였다. 199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아일랜드는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라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이때 GDP(국내 총생산)은 두 배 이상으로 성장하였고 실업률도 감소하였다. 이 경제 호황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해 끝이난다. 2015년 동성 결혼 합법화, 2018년 낙태법 개정 등이 이루어져 보수적 사회 가치관이 약화되었고 2019년, COVID-19 팬데믹으로 경제와 사회는 더욱 위축되었다.

- 아일랜드의 정치

아일랜드의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 의회와 입헌 공화국으로 구성되었다. 아일랜드의 국가 형태는 입헌 공화국이며 주권을 가진 민주 국가로서 헌법은 1937년에 제정되었다.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 의회를 기반으로 대통령, 국회, 정부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 구조는 대통령과 총리(Taoiseach), 의회(Oireachtas)로 구성되었으며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주로 의례적이고 상징적 역할을 하며 임기는 1회 재임이 가능한 7년이다. 총리(Taoiseach)는 정부의 수장으로 정책을 결정하며 실질적 권한을 수행한다. 아일랜드 의회는 상원과 하원, 양원제이며 하원(Dail Eireann, 다일 에레안)은 160명, 임기는 5년이다. 상원(Seanad Eireann, 세나트)은 60명이며 일부는 대통령 임명하고 일부는 지장에서 선출한다. 주요 정당에는 파르티 아일랜드(Fianna Fail), 파르티 리바르타(Fine Gael), 시나펠(Sinn Fein), 노동당(Labour Party), 녹색당(Green Party) 등이 활동한다.

- 아일랜드의 경제

아일랜드 경제는 19세기와 20세기 그리고 최근에 더욱 빠르게 성장을 보여왔다. 특히 제약, 정보 통신 기술, 금융 등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2023년 기준 GDP는 6,200억 달러로서 세계 40위권 경제 규모이다. 아일랜드는 개방된 경제 구조와 낮은 법인 세율(12.5%)로 다국적 기업들의 직접 투자(FDI)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거대 공룡 기업들의 유럽 본사가 있는 나라이다. 또한 제약, 생명공학, IT 산업이 성장 중이며 유럽의 금융 중심지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고품질의 농산물과 유제품을 세계로 수출하기도 한다. 아일랜드의 1인당 GDP는 2023년 기준, 112,000유로이며 이것은 유럽 연합 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아일랜드 경제는 개방된 경제와 외국인 직접 투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 아일랜드의 교육

아일랜드는 체계적 교육 제도를 갖추고 있다. 6세~12세까지는 초등교육이 8학년 동안 진행되어 아일랜드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예술, 체육의 과목을 공부한다. 중학교 과정은 12세에서 16세, 또는 18세까지 이어진다. Junior Cycle(3년)과 Senior Cycle(2년)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 자격 시험인 Leaving Certificate를 치룬다. 고등 교육은 대학과 기술 대학 및 사립 교육 기관으로 구성되었다. 대학교는 학부와 대학원 과정으로 진행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교육 제도를 갖추고 있다. 중요 대학에는 더블린 대학교(Trinity College Dublin), 유니버시티 칼리지 더블린(University College Dublin, UCD), 코크 대학교(University College Cork), 골웨이 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Ireland, Galway), 퀸스 대학교 벨파스트(Queen`s University Belfast), 워터포드 기술 대학교(Waterford Institute of Technology, WIT) 등이 있다.

아일랜드 대학들은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으며 많은 외국 학생들이 유학을 하고 있다. 아일랜드 정부 또한 교육의 수준을 높이고 향상 시키기 위하여 다양하고 지속적인 정책들을 시도하고 있다.

 

3. 아일랜드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아일랜드 유적지

아일랜드 뉴 그레인지

아일랜드에도 유구한 역사만큼 오래된 유적지들이 많다. 미(Meath) 카운티에 위치한 선사시대 고분군, 뉴그레인지(Newgrange)는 B.C.5천년~3천년 사이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이다. 코크(Cork) 카운티에 위치한 오리언 성(Blarney Castle)은 "블라니 돌"로 유명하다. 이 돌에 입맞추면 말솜씨가 좋아진다고 전해진다. 13세기에 건립된 더블린 성(Dublin Castle)은 현재 공공 행사와 회의 장소로 사용된다. 티퍼러리(Tipperary) 카운티에 위치한 티퍼러리 성(Rock of Cashel)은 교회 유적이 있는 곳으로 역사와 문화가 담긴 유적지이다. 미(Meath) 카운티에 위치한 타라 언덕(Hill of Tara)은 아일랜드 고대 왕국의 중심지이며 각 부족의 회의장, 종교 의식을 행한 역사적 유적지이다. 더블린에 위치한 길우에 성(Kilmainham Gaol)은 정치범들을 수감했던 감옥으로서 지금은 박물관으로 운영된다. 위클로(Wicklow) 카운티에 위치한 글렌달로흐(Glendalough)는 중세 수도원의 유적지로서 아름다운 호수와 잘 조화를 이룬다. 안트림(Antrim) 카운티에 위치한 부니하르 성(Dunluce Castle)는 절벽위에 세워진 중세의 성으로 장엄한 해안 경관을 자랑한다. 북 아일랜드에 위치한 카라릭 포인트(Carrick-a-Rede)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과 약 20m 높이의 다리가 있다.

- 아일랜드의 자연 경관

아일랜드 클리프 오브 모흐아일랜드 케리 산맥
아일랜드 클리프 오브 모허 아일랜드 케리 산맥

아일랜드는 신화와 전설의 나라답게 아름답고, 웅장하고, 다양한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아일랜드 서부, 클레어(Clare) 주에 위치한 높이 214m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클리프 오브 모허(Cliffs of Moher)는 8km까지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아일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 코크(Cork)와 서부에 위치한 클레어(Clare) 주에 걸쳐있는 바렌(The Burren)은 석회암 지형의 평평한 돌밭과 다양한 식물들로 유명하다. 아일랜드 서쪽 해안은 이니시어(Inisheer), 이니쉬만(Inishmaan), 이니시모어(Inishmore)의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아란 제도(Aran Islands)가있다. 아일랜드 남서부 케리 주에 위치한 케리 산맥(MacGillycuddy`s Reeks)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맥이며 이곳에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높은 1.038m의 카라운 툴라(Carrauntoohil) 산이 있다.

더블린을 가로지르는 리 강(River Liffey)은 강변을 따라 아름다운 공원과 산책로가 있다. 위클로 주에 위

치한 글렌달로흐(Glendalough)는 두 개의 아름다운 호수와 고대 수도원이 있는 유적지이다. 클레어 주에 위치한 블랙헤드(Black Head)는 초원과 해안지역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곳이며, 더블린 베이(Dublin Bay)는 더블린 주변의 해안선을 따라 해변과 바다의 경관이 펼쳐져있다. 아일랜드에는 호수도 많다. 로흐 네이(Lough Neagh), 로흐 체르(Lough Corrib), 로흐 다르(Lough Derg), 론 호수(Lough Rinn), 니하 호수(Lough Neagh), 캐릭 호수(Lough Carra) 등과 같은 거대한 호수들이 산과 숲으로 둘러 싸여있다. 아일랜드는 신화와 전설의 나라 답게,  바다, 산, 호수, 절벽, 해안선 등 다양한 경관이 조화롭게 형성되어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나라이다.

아일랜드 아란 제도

 

 

고대부터 오랜 세월 이어져 온 풍부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아일랜드는 드루이드와 중세의 성들, 기독교 문화와 켈트족의 전통, 그리고 음악과 문학, 예술이 환상적인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되어 왔다. 고요한 호수들, 푸른 초원, 장엄한 절벽들과 산맥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랜 세월 잉글랜드에 저항하여왔다. 1949년, 공식적 독립 공화국으로 선언한 이후 켈틱 타이거 시기를 통해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루어 유럽의 경제 중심국 중 하나가 되었으며 높은 교육 수준으로 신화와 전설의 나라답게 아일랜드는 현대적인 발전을 다시,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