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로 덮여진 초록색의 나라, 그린란드(Greenland)의 정식 명칭은 덴마크어의 "그린란드(Greenland)"와 그린란드어의 "칼라흘리트 누나트(Kalaallit Nunaat)"의 두 가지 이름이 있다. 그린란드는 덴마크어 명칭으로서 초록색 땅이라는 뜻이며 9세기경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이 그린란드로 이주하고 정착하면서 불려진 이름이다. 전승에 의하면 빙하로 덮여진 척박한 그린란드로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초록색 땅"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 전해진다. 그린란드어로는 "칼라흘리트 누나트(Kalaallit Nunaat)"로서 "칼라흘리트 누나트인들의 땅"이라는 뜻이다. 칼라흘리트 누나트는 그린란드 원주민들을 말하며 이들은 이누이트족의 한 갈래이다. 그린란드의 공용어는 "그린란드어(Kalaallisut)"어와 덴마크어가 공용어로 사용된다. 그린란드어는 에스키모-알류트 어족에 속하며 그린란드의 원주민이었던 이누이트족이 사용했던 언어이다. 역사 기록의 부재로, 언제, 어떻게, 그린란드가 덴마크의 식민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는 18세기에는 덴마크 식민지였다는 점이다. 과거 덴마크 식민지때부터 그린란드는 덴마크어를 사용하였으며 이것은 현재까지도 교육,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덴마크어가 사용된다.
1. 그린란드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그린란드의 영토와 수도
빙하로 덮여진 초록색의 나라, 그린란드는 세계 최대의 섬이며 면적은 216만 6086 제곱킬로미터이다(남한 면적의 21배). 그린란드의 북쪽은 북극해와 접하며, 남서쪽은 대서양, 동쪽은 그린란드해, 서쪽은 배핀만과 캐나다, 남쪽은 레브라도해와, 노르웨이해와 접하며 아이슬란드와 해양 경계선을 이룬다. 그린란드는 섬의 85%가 빙하로 덮여 있으며 두께는 최대 3천미터에 달한다. 그린란드는 지리적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에 속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유럽과 덴마크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린란드의 수도는 "곶"이라는 뜻을 가진 누크(Nuuk)이며 그린란드의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도시로서 2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 그린란드의 인구와 인종
그린란드의 전체 인구는 약 5만 6천명 정도이며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낮은 나라이다. 그린란드의 인구는 주로 수도가 있는 남서부 해안에 밀집되어 거주하며 내륙과 북쪽은 인구 밀도가 매우 낮고 소규모 마을들은 어업과 사냥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그린란드의 원주민은 원래부터 북극 지역에 거주하였던 이누이트족(에스키모)이 88%를 차지하며, 나머지12%는 덴마크인과 기타 유럽계 이민자들, 기타 소수의 다른 만족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린란드의 인종은 이누이트족을 중심으로 소수의 다양한 인종이 다문화를 이루며 살고있다.
2. 그린란드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그린란드의 역사
빙하의 나라 그린란드의 역사는, 극한의 추위와 빙하로 덮여있지만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그린란드의 역사는 초기 이누이트족의 정착 시대, 바이킹들의 정착시대, 덴마크의 식민시대, 현대로 나누어진다.
그린란드에 가장 먼저 정착한 사람들은 이누이트(에스키모)족이다. B.C.2500년전, 이누이트족의 조상(툴레인)들이 북극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A.D.12세기와 13세기에 그린란드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B.C.2500년전, 툴레인(Thule People)이 알래스카 서부에서 북극으로 이동하였으며 A.D.12세기와 13세기에 썰매를 개발하여 그린란드에 도착했다고 전해진다. 툴레인들은 사냥과 어업에 뛰어났으며, 고래를 식량으로 삼아 고래 사냥에 필요한 도구와 기술을 발달시켰다. 툴레인들은 고래의 뼈로 집을 짓고 고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극한의 추운 환경에도 적응했다. 또한 개를 이용한 썰매가 이동 수단이었으며 석기, 뼈 등의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사이에, 노르웨이에서 그린란드로 바이킹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985년, 노르웨이에서 추방된 에릭 붉은 코(Erik the Red)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린란드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붉은 코"의 본명은 에리크 토르발드손(Eirik Thorvaldsson)이며 10세기 노르웨이의 바이킹이며 탐험가였다. 머리와 수염이 붉은 색이어서 에리크는 "붉은 코"라고 불려졌다. 에릭은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났으며 여러 범죄로 인하여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되었다. 추방당한 에릭은 985년,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났으며 1년후 도착한 곳이 그린란드이다. 붉은 코는 그린란드 남서쪽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붉은 코"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린란드로 오게하기 위하여 "초록색의 땅"이란 뜻의 "그린란드"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이슬란드보다 기후가 좋고 자원이 풍부하다고 선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린란드의 정착지로 이주하게 된다. 붉은 코의 아들 레이프 에릭슨(Leif Erikson)은 북미 대륙까지 탐험하였으며 "빈란드(Vinland)"라는 땅을 발견하였는데 이곳은 현재의 캐나다 남부 지역을 말한다.
"붉은 코"의 선동으로 북유럽과 아이슬란드의 사람들이 그린란드를 향하게 된 이유는 북유럽 지역의 인구 증가와 좁은 땅으로 인해 새로운 삶의 터전이 필요해서였다. 바이킹들이 정착할 시기, 그린란드는 농경과 목축이 가능한 지역이었으며 해양 자원도 풍부하여 생활에 적합한 땅이었다고 전해진다. 바이킹들은 주로 그린란드 남부의 비교적 따뜻한 지역에 두 개의 정착지(동부와 서부 정착지)를 건설하여, 교회(기독교)를 짓고,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을 키우며 살았다. 그러나 14세기부터 15세기사이에, 소빙기가 찾아와 급격한 추위로 인하여 농업과 어업이 불가능해졌고 목축도 어려워졌다. 14세기의 흑사병이 그린란드에도 상륙하여 이누이트족도, 바이킹들도 많이 죽음을 당하여 인구가 감소되었으며 극한의 추위속에서 무분별한 벌목과 가축들의 방목으로 이누이트족과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소빙기라는 기후변화, 환경파괴, 흑사병, 이누이트족과의 갈등 등, 여러 복잡한 요인으로 인해 결국 바이킹들은 그린란드를 떠나게 된다. 16세기 후반인, 1576년, 영국의 탐험가였던 마틴 프리먼트(Martin Frobisher)가 그린란드 서해안에 상륙하여 탐험을 하였다. 마틴은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후원으로 북서 항로를 찾아 탐험하는 중, 그린란드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틴이 그린란드에 도착했을때 바이킹들의 흔적은 찾지 못했으며 다만 이누이트족들과 접촉하게 된다. 1585년, 영국의 탐험가 존 데이비스(John Davis)가 그린란드 동해안을 탐험하고 이누이트족과 교류하였다. 존 데이비스 역시 북극 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탐험 중, 그린란드에 상륙하였으며 존은 북극해 항로 개척에 큰 기여를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대서양과 북극해를 연결하는 해협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을 존 데이비스 이름을 따서 "데이비스 해협"이라 이름을 붙였다. 18세기부터 그린란드는, 덴마크의 지배가 시작된다.
1721년, 덴마크-노르웨이의 루터교 선교사였던 "한스 에게데(Hans Egede)"가 그린란드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하였다. 고트호프(Godthab,현재의 누크)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이누이트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한스는 그린란드의 사도로 불려질 만큼 이누이트족에게 선교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한스 에게데의 선교 활동으로 덴마크는 그린란드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여 식민지로 병합됨으로서 그린란드는 덴마크의 법과 행정 체제를 따라야 했다. 기독교, 덴마크식 의복, 덴마크의 생활과 음식, 덴마크 의료시설, 덴마크 학교와 덴마크어 교육 등 덴마크의 영향으로 이누이트족의 삶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린란드는 덴마크어가 공용어가 되었으며 이누이트어는 점차 쇠퇴하였다. 그린란드는 갑자기 덴마크의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니다. 점진적으로 서서히 덴마크의 지배 안으로 들어왔으며 18세기에는 이미 덴마크의 법과 행정체제에 지배를 확실히 받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이러한 법과 행정 체계가 그린란드에 더욱 강화되었다. 모피 중심의 이누이트족의 무역은 고래 잡이 산업으로 전환되었으며 고래 사냥을 위한 새로운 사냥 방법이 도입되었다. 따라서 19세기의 그린란드는 고래 잡이 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이것은 그린란드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덴마크는 그린란드 전역에 초등학교와 의료시설을 설립하였으며 인프라를 더욱 적극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따라서 이시기는 그린란드가 현대 사회로 진입하는 전환점으로서 교육, 의료, 인프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덴마크의 지배아래에서 국제 사회로 나아가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덴마크로부터 교육을 받은 이누이트족은 자의식이 높아졌고 민족주의 의식에도 눈이 띄여졌다. 이때부터 이누이트족은 덴마크에 대한 지배권을 줄여나가면서 자치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덴마크의 지배에 대한 저항 움직임도 나타났다. 2차 세계대전(1939~1945년) 중, 그린란드는 데마크와 교류가 단절되고 끊어졌다. 이것은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족에게는 자립심과 독립에 대한 계기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덴마크는 다시 그린란드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하였지만, 그린란드 이누이트족은 자치를 요구하며 강하게 저항하였다. 1950년부터 그린란드는 덴마크의 공식적 식민지로서 1명의 총독에 의하여 관리되었던 단일 식민지가 되었다. 1953년, 덴마크는, 그린란드를 "주"로 승격시켜 덴마크의 "한 주"가 되었으며 이것으로 그린란드 사람들은 덴마크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1979년, 그린란드와 덴마크는 홈룰(Home Rule) 협정을 체결함으로서, 그린란드는 자치권을 부여받게 된다. 이 협정으로 그린란드는 자체 법률과 의회를 구성하고 정치, 경제, 문화적 자율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외교, 국방과 같은 중대한 부분은 덴마크 정부가 담당한다. 현대의 그린란드는 1979년 자치권을 획득한 이후, 지속적으로 자치권의 확대를 요구하여 2008년에는 더욱 확대된 자치권을 얻게되었다. 또한 동시에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덴마크와의 관계 또한 재정립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독립에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 기반 시설의 부족, 국제 사회의 인정 등 해결해야 할 다양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21세기의 그린란드는 기후 변화, 자원개발, 독립 등과 같은 다양한 문제를 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 그린란드의 정치
그린란드의 정치 체제는 1979년 자치 권을 부여받은 후부터 덴마크 왕국 안에서 자치 정부를 운영하고 있는 형태이다. 2009년에는 이 자치권이 더욱 확대되어 정치와 행정에 더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법, 법무, 경찰, 경제와 천연 자원 등 대부분의 내정에 관하여 독립적인 정책과 행정에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외교, 국방, 헌법에 관해서는 여전히 덴마크의 권위 아래 지배를 받고있다. 그린란드 입법기관, 의회(랜드스팅, Inatsisartut)는 의원 내각제로서 임기 4년의, 31명으로 구성되었다. 총리는 그린란드의 행정 수반이며 내각을 구성하고, 행정부를 이끌며 정책을 실행하고, 의회의 다수당에 의해 선출된다. 주요 정당에는 시아무트(Siumut), 인위트 아타카티기잇(Inuit Ataqatigiit), 나룩(Naleraq) 같은 당들이 경쟁한다. 정당들은 독립을 지지하는 당들과 반대하는 당들이 활발하게 논의하며 경쟁 한다. 최근 기후변화로 인하여 그린란드는 자원 개발에 대한 문제로 정치적, 경제적 자립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 그린란드의 경제
그린란드의 경제는 수산업이 핵심 산업이며 넙치, 새우, 대구와 같은 어종과 해산물이 주요 수출품이고, 주요 수출국은 아시아와 유럽 국가들이다. 그린란드는 독특한 자연 경관으로 인하여 관광업이 성장하고 있다.
빙하, 피요르드, 북극광(오로라), 생태 관광, 모험 관광 등은 매력적인 관광 상품이다. 그러나 그린란드의 낙후된 인프라와 교통으로 관광 산업은 소폭 성장하는 단계이며 대 규모 성장에는 아직 한계가 있다. 덴마크 정부는 매년 그린란드에 경제를 지원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린란드의 교육, 의료, 인프라와 공공 서비스에 사용된다. 덴마크의 지원으로 그린란드의 경제는 그마나 안정을 유지한다. 그린란드는 천연 자원이 풍부하다. 희토류, 철광석, 아연, 금, 우라늄 같은 광물자원이 풍부하여 자원 개발에 관한 여러 정책들을 펼치고 있다. 기후 변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여러 외국 기업들이 그린란드의 자원 개발에 관심을 가지게되었다. 2023년 기준, 그린란드의 GDP는 32억달러로서 세계 175위의 작은 경제 규모이다. 그린란드는 어업과 덴마크로부터의 재정 지원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이며 자원 개발과 관광업을 중심으로 성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낙후된 인프라의 개선과 경제 다변화가 필요하다.
3. 그린란드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그린란드의 유적지
그린란드는 극한의 추위 속에서 생존한 이누이트족과 바이킹들의 독특한 역사와 전통이 반영된 여러 유적지들이 있다. 일루리사트 아이스피요르드(Ilulissat Icefjord)는 빙하가 놀아서 바다로 빠져 들어가는 곳이며, 이곳에는 고대 이누이트족의 생활 흔적도 남아있다. 그린란드의 남서부에 위치한 노르세 바이킹 유적(Norse Viking Ruins)은 10~15세기 사이 바이킹들의 정착지에 관한 유적들이다. 특히 브라탈리드(Brattahlid)는 에릭 붉은 코(Erik the Red)가 처음 정착한 곳으로서 바이킹들의 집터, 교회가 남아있다. 카타콰카 케르미야트(Kangeq)는 이누이트족과 덴마크 식민지 시대 유물이 있는 고대 마을이다. 이곳은 19세기 중반 그린란드와 덴마크의 초기 무역의 장소로서 이누이트족과 덴마크인들의 전통적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린란드 남쪽에 위치한 헤르줄프스나(Herjolfsnes)는 중세 바이킹들의 의복과 유골, 무덤과 교회의 유적지가 있다. 그린란드 북쪽에 위치한 크네크트시네나르나크(Kugssuk/Kekertarmiut)는 극한의 환경에서 생존하였던 고대 이누이트족의 생활을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 그린란드의 자연 경관
그린란드는 산맥, 광대한 빙하, 피요르드, 북극광 같은 경이로운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매년 거대한 빙하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일루리사트 아이스피요르드(Ilulissat Icefjord)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된 만큼 유명하다. 일루리사트 아이스피요르드 근처에 있는 에퀴 빙하(Eqip Sermia Glacier)는 보트를 타고 빙하 근처까지 가서 빙하를 관찰할 수 있다. 그린란드의 남쪽에 위치한 사르팍(Sarfannguit)은 깊은 피요르드와 거대한 절벽이 어우러진 멋진 경관을 자아내는 곳이다. 이곳은 카약, 하이킹을 통해 바다와 산악지대 사이
에서 그린란드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린란드의 동부에 위치한 타실락(Tasiilaq)은 험한 산악과 피요르드로 이루어진 지역이며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타실락은 그린란드에서 여섯번째로 큰 도시이며 북극의 자연과 고래, 빙하와 피요르드(Fjord), 북극광, 북극 툰트라(Tundra)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린란드의 중심부에 위치한 카타콰카(Kangerlussuaq)는 비교적 작은 도시이지만 그린란드 내륙의 광대한 사막과 빙하를 탐험할 수있다. 그린란드는 순록, 북극곰, 북극여우, 고래, 물개, 바다표범 등 다양한 동물이 서식한다. 이러한 자연 환경을 탐험하기 위한 모험가들과 자연 애호가들에게 그린란드는 인기있는 관광지로 알려져있다.
빙하로 덮인 초록색의 나라, 그린란드는 세계에서 제일 큰 섬이며 빙하와 피요르드, 툰트라, 북극광과 같은 북극의 다양한 자연 경관으로 인하여 관광업이 소폭 성장하고 있다. 바이킹과 이누이트 족의 역사와 문화 유적지를 통해 그린란드의 고대와 현대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제공받는다. 경제는 광업, 어업과 덴마크의 재정 지원으로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안정적이다. 지구 온난화, 기후 이상으로 그린란드의 빙하가 빠르게 녹음으로서 해수면 상승의 원인이 되고 있다. 빙하가 빠르게 녹으면서 그린란드는 자원 개발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지고 있지만 환경 보호와 충돌한다. 또한 빙하가 녹아 내림으로서 빙하 아래에 묻혀 있던 영구 동토층도 함께 녹아서 메탄 가스가 대량으로 방출되어 지구의 온실 효과는 더욱 심화되고 가속화 될 것이다. 빙하의 감소와 해수면 상승은 해양 산성화를 가속화시켜 해양 생태계에도 큰 위협이 된다. 그린란드의 빙하는 이러한 여러 문제를 안고 있으며 덴마크 자치령이지만 독립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