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가 속한 섬을 말하며 "브리튼(Britain)"은 고대 로마 사람들이 브리튼 섬을 "브리타니아(Britannia)"라고 부른데서 유래하였다. 그레이트(Great)는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통합되는 과정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구분하기 위하여 추가된 이름이다.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은 1801년, 아일랜드가 잉글랜드와 통합되면서 사용한 이름이다. 1992년, 아일랜드가 독립하면서 북 아일랜드만 잉글랜드에 남아, 현재 공식적 국명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다. 이것을 줄여서 "잉글랜드(United Kingdom, UK)"라 부른다.
잉글랜드의 공식적 언어는 영어(English)이며 스코틀랜드(Scotland)는 영어와 스코틀랜드 게일어(Scottish Gaelic), 스코트어(Scots)를 사용한다. 웨일스(Wales)는 영어와 웨일스어(Welsh)가 사용되며 북아일랜드(Northern lreland)는 영어, 아일랜드어(lrish), 얼스터 스코트어(Ulster Scots)가 사용된다. 이처럼 잉글랜드는 다 민족, 다 문화, 다 언어 사회로서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한다.
1. 영국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영국의 영토와 수도
북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 본토의 총 면적은 약 243.610 제곱킬로미터이며 본토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아일랜드가 있고 해외영토는 지브롤터, 포클랜드 제도, 버뮤다, 케이맨 제도, 영국령 버진 제도, 세인트 헬레나, 영국령 남극 지역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소규모 해외 영토들이 있다.
"잉글랜드(England)"의 총 면적은 130,279 제곱킬로미터로서 영국에서 제일 큰 나라이며 수도는 "런던(London)"이다. 런던의 총 면적은 1,572 제곱킬로미터이며 2023년 기준, 약 900만명이 거주 중이다. 런던은 유럽에서도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로서 영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스코틀랜드(Scotland)"는 영국 북부의 나라이며 수도는 "에든버러(Edinburgh)"이다. 에든버러의 총 면적은 264 제곱킬로미터이며 2023년 기준, 인구는 약 54만명이 거주한다. "웨일스(Wales)"의 총 면적은 20,779 제곱킬로미터이며 2023년 기준, 인구는 약 317만명이다. "북 아일랜드(Northern Ireland)"의 총 면적은 14,139 제곱킬로미터이며 2023년 기준, 인구는 약 190십만명이다.
- 영국의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영국의 총 인구는 약 6,700만명이며 인종 비율은 영국인,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등 백인이 약 81%이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중국, 동남아시아 등 아시아계가 9%, 아프리카, 카리브해 등 흑인이 3%, 기타민족과 혼혈이 7%정도이다.
2. 영국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영국의 역사
영국의 역사는 고대 및 중세, 왕국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왕정과 의회의 갈등시기, 제국과 산업혁명, 1, 2차 세계 대전, 현대로 나누어 진다. 영국의 고대는 B.C.3천년경, 브리튼 섬에 여러 다양한 민족이 정착 함으로서 시작된다. 이때의 유적으로 거석 구조물인 "스톤헨지"가 유명하다. B.C.800년경 켈트족이 대거 이주하여 브리튼섬에 정착하였다. 이시기부터 켈트족은 브리튼족으로도 알려졌다. B.C. 55년과 54년, 두 번에 걸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브리튼 섬을 탐험하였지만 정복은 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외삼촌이며 의부이다. 카이사르는, 전쟁 영웅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Gnaeus Pompeius Magnus),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와 함께 삼두 정치(First Triumvirate)를 했던 정치가였으며 군대 지휘관이었다. 카이사르가 브리튼 섬을 탐험한, 11년후, B.C.43년, 로마 제국의 4번째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황제(Claudius)"의 명령으로 브리튼 섬을 정복한 후 "로마 브리탄니아(Roma Britannia)"를 형성하였다. 이때 로마군 지휘관은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Aulus Plautius)"였다. 그는 4만명의 로마 군대를 이끌고 브리튼 섬에 상륙하여 브리튼 족 지도자 카리쿠스(Cariacus)와의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두면서 브리튼 섬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로마군은 내륙으로 더 진격하여 지금의 콜체스터에 위치한 "캄울로두눔(Camulodunum)"을 공격하여 정복함으로서 로마의 첫 번째 브리튼 식민지를 세웠다. 로마는 브리튼 부족들을 하나씩 정복하면서 영국 남부를 모두 장악하였고 캔터베리, 로마의 런던(당시는 론디니움, Londinium)과 같은 주요 도시들을 세웠다. A.D 60년, "이스트 앵글리아 부족"으로 알려진 켈트족의 "부드리(Boudica)" 여왕이 반란을 일으켜 브리튼 섬에 세워진 로마의 여러 식민지 도시들을 공격하고 불태웠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여러 전투를 치루며 "부드리 여왕"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며 A.D.1세기까지 로마는 브리튼 섬 전체를 정복하였다. A.D.410년, 로마 제국의 쇠퇴로 브리튼 섬에서 로마 군대가 철수함으로서 브리튼 섬은 다시 브리튼의 여러 부족이 통치하게 된다. 5세기초부터, 지금의 독일과 덴마크 지역에서 "앵글로 색슨족(Anglo-Saxons)"이 브리튼 섬으로 이주하여 켈트족과 충돌하면서 머시아, 앵글랜드, 노섬브리아 등과 같은 여러 왕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브리튼족과 앵글로 색슨족은 계속 전투를 벌였으며 5세기 중반에는 두 번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것은 "바르니 전투"와 "애플스 전투"이다. 바르니 전투는 브리튼 족이 승리하였고 애플스 전투에서는 앵글로색슨족이 승리하였다. 6세기초,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섬 대부분을 정복하였고 브리튼족은 지금의 웨일스, 스코틀랜드, 콘웰, 아일랜드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현재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브리튼족의 후손들이다. 6세기부터 7세기 초반까지, 브리튼섬을 장악한 앵글로색슨족은 머시아(Mercia), 웨식스(Wessex) ,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 노섬브리아(Northumbria) 등 여러 왕국을 건설하였고 서로 동맹과 경쟁을 통해 영토와 권력을 확장해 나갔다.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초까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어그스틴)", "패트릭(Patrick)", "코넬리우스(Cuthbert)", "밀드레드(Mildred)", "보두이노(Bede)"와 같은 선교사들에 의하여 브리튼 섬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8세기초, 웨식스 왕국이 강력하게 성장하여 다른 여러 왕국을 지배하였다. 동시에 스코틀랜드로 밀려났던 브리튼족(켈트족)들도 픽트(Picts), 스코츠(Scots)와 같은 여러 왕국들이 세워졌으며 웨일스에서도 켄트(Kent), 캘리(Gwynedd), 포우이스(Powys)와 같은 왕국들이 세워졌다. 이와같이 중세의 브리튼섬은 이제 왕국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8세기 중반, 노르웨이와 덴마크 부근의 바이킹들이 브리튼 섬의, 여러 지역의 교회, 수도원을 공격하였다. 9세기초, 노섬브리아 왕국, 머시아 왕국, 웨식스 왕국들과 바이킹과의 전투가 이어졌다. 웨식스의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은 878년, 에드링턴 전투에서 바이킹을 상대로 승리하여 바이킹과의 전쟁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시기 브리튼 섬의 여러 지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에 바이킹들이 정착하였으며 9세기 중반, 영국 동부 지역에서 "데인로(Danelaw)"라는 지역을 형성하여 통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잉글랜드 왕국"을 통치하였던 "에드워드 참회"가 사망하게 되고 왕위를 둘러싸고 왕의 후계자였던 "해럴드 고드윈스"와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이었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후에 윌리엄 정복자)"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게 된다. 해럴드 고드윈스가 에드워드 참회이 후계자로 왕위에 올랐지만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도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여 결국 1066년 10월 14일 잉글랜드 하스팅스 근처에서 전투(하스팅스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에서 해럴드 고드윈스는 화살에 맞아 사망함으로서 윌리엄 공작(윌리엄 정복자)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하스팅스 전투는 노르만 정복(Norman Conquest)으로 알려졌으며 앵글로-노르만시대를 알리는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 후 윌리엄은 런던 및 기타 여러 지역의 도시들을 정복해나갔다. 그리고 1066년, 12월 25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여 21년을 통치하다가 1087년 윌리엄은 프랑스 루앙에서 사망하였다. 1100년 잉글랜드 왕국은 윌리엄 2세(1087년~1100)와 헨리 1세(1100년~1135년)가 차례로 통치하였고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와의 갈등과 내부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하여 혼란스러웠으며 웨일스는 여러 왕국이 서로 갈등과 세력다툼으로 일관하였으며, 잉글랜드 왕국이 웨일스를 참략하고 통제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1100년대의 브리튼 섬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사이에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진 시대였다. 1106년, 헨리 1세는 형, 로베르트 1세(노르망디 공작)가 통치하고 있던 노르망디(프랑스 노르망디의 포르튀에 전투, Battle of Tinchebray)를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이것은 1200년대로 그대로 이어져 왕권, 귀족, 교회와의 관계가 서로 얽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1204년,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필립 2세(Philippe 2,1180년 즉위~1223년)"는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프랑스의 노르망디를 다시 되찾게 된다. 당시 잉글랜드는 헨리 2세(5번째 왕)의 아들, 존 왕(John,1199년 즉위, 7번째 왕)이 통치하였고, 필립 2세는 프랑스의 영토 확장을 위해 존 왕과 여러번의 전투를 벌였다. 거듭된 패전으로 존 왕은 귀족들과의 갈등도 깊어지고 왕권도 약화되었다. 존 왕은 귀족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왕권이 약화된 존 왕은 결국, 1215년 6월 15일에 귀족들, 대지주들과의 회의에서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문서에 서명하게 된다. 이 문서는 왕권의 제한과 귀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존 왕은 이 문서를 따르지 않았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1215년부터 1217년까지, 1차 바르니 전쟁(1215~1216년)과 2차 바르니 전쟁(1216~1217년)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1차, 2차 모두 귀족 연합이 승리한다. 2차 반란으로 인한, 링컨 전투(Battle of Lincoin)에서의 귀족 연합의 승리는 왕권을 더욱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1216년, 존 왕은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헨리 3세(Henry 3)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1223년 프랑스의 왕, 필립 2세도 사망하게 되고, 그의 아들 루이 8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프란체스코회(1209년 설립)와 도미니크회(1216년 설립)와 같은 새로운 수도회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잉글랜드의 9번째 왕, 에드워드 1세(Edward 1, 1272~1307)의 통치때인, 1282년 웨일즈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게 됨으로서 "길의 정복자"로 불려지게 되었다. 또한 1296년에는,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여 정복하였다. 이때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위해 잉글랜드와 맞서 싸우고자 하였다. 특히 윌리엄 월레스(William Wallace)와 로버트 더 브루스(Robert the Bruce) 같은 지도자들이 독립군을 지휘하였다.
1297년 9월 11일, 윌리엄 월레스는 "스털링 다리 전투(Battle of Stirling Bridge)에서 잉글랜드 군을 대파하여 독립 운동의 상징이 되었지만 1305년 잉글랜드는 다시 군대를 보내 스코틀랜드를 제압하였다. 이때부터 잉글랜드는 밖으로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안으로는 귀족들과의 갈등과 반란을 겪어야 했다. 1307년, 에드워드 1세의 사망과 "에드워드 2세(Edward 2,1307~1327년)"의 즉위, 1312년, 귀족들의 반란, 1314년 스코틀랜드의 "배녹번 전투(Battle of Bannockburn, 강이름)", 1326년 에드워드 2세의 아내, "이사벨라(Isabella of France, 1295~1358년, 프랑스 핍립4세의 딸)"가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와서 에드워드 2세를 폐위(1327년 버클리성에 감근되채 9월에 사망)시킨일, 그의 아들 에드워드 3세의 왕위 등극, 1328년, 에딘버러-노섬프턴 조약을 통해 스코틀랜드 독립을 승인, 1329~1332년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두고 벌어진 내전과 여기에 개입된 잉글랜드, 1333년 "할리던 힐 전투(Battle of Halidon Hill)", 1346년 "네빌스 크로스 전투(Battle of Neville`s Cross)"등 여러 전쟁을 치루어야 했으며, 1357년, "베릭 조약(Treaty of Berwick)"을 통해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승인함으로 긴 전쟁도 종결된다. 1337년부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가운데 프랑스와도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이 전쟁은 양국의 왕위 계승 문제,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 문제, 경제 문제 등 다양한 것들이 얽혀서 116년 동안 이어졌다. 백년 전쟁(Hundred Years` War,1337~1453년)은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아들없이 죽음을 맞게되자 프랑스 귀족들이 필립 6세(발루아 가문)을 추대하였고, 여기에 잉글랜드는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샤를 4세의 누나)가 왕위 계승자라 주장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아키텐(Aquitaine) 지역은 잉글랜드 왕의 소유였는데 이것을 프랑스가 통제하여 하였으며, 잉글랜드는 당시 양모 생산과 수출국으로서, 플랑드르의 섬유산업의 원자재를 공급하였는데 수출을 금지하여 플랑드르 섬유 산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된다. 이러한 것들이 뒤엉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크레시 전투(Battle fo Crecy, 1346년 영국 승리), 프랑스의 칼레 함락(Calais,1347년), 1349년 흑사병(Black Death), 1350년대, 종교 개혁의 선구자존 위클리프(John Wycliffe,1384년 사망)와 그의 제자들(로리츠라 불림, Lollards)의 등장,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1356년 영국 승리), 브레티니 평화 조약(1360년),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1415년 영국승리), 1420년,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 영국의 헨리5세와 그 후손들이 프랑스 왕위 상속), 1142년, 잔다르크(Jeanne d`Aarc, 1431년 영국에의해 처형됨)의 등장과 프랑스군의 승전, 1453년 카스티용 전투(Battle of Castillon, 프랑스 승리)등 많은 사건과 전투를 치루면서 백년 전쟁은 종결된다. 1455년~1487년까지,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권력 다툼으로 32년 동안 잉글랜드는 내전이 발생하였다. 이 두 가문은 각각 빨간 장미(랭커스터 가문)와 흰 장미(요크 가문)를 상징으로 사용하였기에 이 전쟁을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이라고도 한다. 정치적 음모와 여러 차례의 전투를 통하여 결국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Henry Tudor, 헨리 7세)"가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Richard 3, 요크가문의 세번째 왕, 잉글랜드 26번째 왕)를 1485년 8월 22일, "보스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에서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면서 장미 전쟁은 끝이났다. 이로인하여 튜더 왕조가 시작되어 118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잉글랜드 정치는 안정을 찾게된다. 16세기의 영국은 정치, 종교, 사회적 변화가 많았던 시기였으며 "헨리 8세(1509~1547년)"는 아내(이름:캐서린 아라곤)와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교황과 카톨릭 교회로부터 영국 교회의 독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534년,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과 관계를 끊고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 6세(1547~1553년)는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강화하였고 영어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에드워드 6세의 뒤를 이어 카톨릭 신자였던 그의 이복 누나, 메리 1세가(1553~1558년) 여왕이 된 후 잉글랜드의 종교는 다시 카톨릭으로 회복하고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였다. 이 일로 메리 1세는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메리 1세의 통치때 많은 수도원이 재건되고 카톨릭의 영향력이 다시 살아났다. 메리 1세의 뒤를 이어 그녀의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1,1558~1603년) 여왕이 통치하였다. 엘레자베스 1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였지만 메리 1세의 정책과는 전혀 다른,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으며 그로인하여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갈등이 완화되었다. 이시기에 영국 국교회였던 성공회(Church of England)가 정립이되었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학가들이 등장하여 예술과 과학이 발전하였다. 또한 해양 탐험을 장려함으로서 영국 탐험가들이 신대륙으로 진출하여 식민지 정책을 펼침으로서 잉글랜드의 제국주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카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은 메리 1세의 카톨릭 회복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면서 영국은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었으며 이런 상황속에서 해양과 신대륙 탐험을 장려한 엘리자베스는 스페인 식민지에 대한 공격을 허용하여 갈등은 덕욱 심해졌다. 1588년 7월, 스페인은 130척의 함대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영국을 침략하여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여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카톨릭 신앙을 회복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해군 제독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에게 패전하여 스페인 "무적함대(Armada)"는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고 그로인해 스페인의 해양 패권은 약화되었다. 17세기 초, 1600년, 청교도들이 등장하여 잉글랜드 국교(성공회)의 객혁을 요구하였다(일부는 미국으로 이주). 1603년,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 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제임스 1세(1603~1625년)란 이름으로 등극하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하여 "그레이트 브리튼"이라 선언하였다. 제임스 1세의 사망 후 그의 아들 찰스 1세(1625~1649)가 통치하였다. 그는 의회와의 갈등으로 내전이 발생하였는데, 의회파(토리당)의 주요 지도자인 "크롬웰"은 "뉴모델 군대"를 조직하여 1645년 나셋 전투에서 왕당파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결과 1649년, 찰스 1세는 반역 죄로 처형되었다. 1660년, 크롬웰의 사망후 찰스 2세가 왕으로 즉위(왕정복고)하여 의회와의 관계를 개선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또한 아이작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이 등장하여 과학이 발전된 시기였으며 존 밀턴의 "실낙원"과 같은 문학적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스코틀랜드는 1707년까지 독립 왕국으로 존재하다가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에 따라 잉글랜드와 연합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을 형성하였다. 1700년대 후반과 1800년대 초반, 잉글랜드는 산업 혁명으로 경제 구조가 농업 중심의 경제에서 산업 중심의 경제로 전환되었으며,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어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섬유 산업, 제철 산업 등과 같은 산업들의 발달로 공장과 기계화가 도입되었다. 1832년에는 선거법 개혁이 이루어져 민주주의가 한층 확대되었으며 1833년, 산업화로 인한 노동권 보장과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19세기 중반, 잉글랜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인도,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카리브해 등,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한 잉글랜드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더욱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칸트, 헤겔, 피히테 등과 같은 이성, 과학, 철학, 개인의 권리 및 사회적 진보를 강조하는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등장하였다. 계몽 주의는 개인의 판단을 중요시 하였고 이성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과학적 방법, 합리적 사고로 발전했다. 이때 혁신과 과학적 발견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다윈의 진화론, 뉴턴의 물리학 등에 의하여, 기존의 종교, 전통, 왕권 등에 대한 바판적 사고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계몽주의 사상은 미국 독립 혁명(1776년), 프랑스 혁명(1789년)에 영향을 미쳤고 유럽 전역에서 계몽 주의 정치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1914년~1918년, 일어난 1차 세계대전에 잉글랜드는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전쟁기간, 많은 여성들이 노동 시장에 진입함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으로 인해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고, 1928년,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이 주어졌다. 1800년대 초반부터,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아일랜드가 자치를 요구하며 1916년 4월 24일 부활절에 독립을 선언하며 봉기하여 더블린 시내의 주요 건물을 점거하며 6일 동안 저항하였다. 이것은 영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450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가 생겼으며 독립군 지도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것은 6년뒤인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이 수립되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프로테스탄트로 구성된 북 아일랜드는 영국으로 남았고, 나머지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1929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는 미국에서 시작된 대 공항으로 잉글랜드 경제도 큰 타격을 입게된다. 1939년~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함으로서 영국은 또다시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잃게되었고 종전 후, 세계적인 패권도 약화되었다. 20세기 중반, 잉글랜드 산업은 석탄, 섬유 산업과 같은 전통적 산업에서 서비스 산업과 기술 산업으로 전환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비틀즈와 같은 대중 음악과 대중 문화가 발전하여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1973년 "유럽 경제 공동체(EC)"와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여 경제와 정치의 연합을 이루었지만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에 의하여 52%의 탈퇴 지지를 얻어, 2020년 1월 31일 EU에서 공식적으로 탈퇴(브렉시트)하여 지금에 이른다.
- 영국의 정치
영국의 정치는 입헌 군주제와 의회 민주주의가 기반이다. 군주는 국가의 상징적 원수이며 실제 권력은 의회와 정부에게 있다. 잉글랜드의 군주는 명목상 군가 원수이며 국가 행사, 의회 개회식 연설 등 의례적인 역할만 수행하며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의회는, 인원수가 정해지지 않은 상원과 650명의 하원의 양원제로 구성되었으며 현재 약 700~800명의 귀족들이 상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상원은 임명된 귀족, 종교 지도자(성굥회 주교), 법관 등으로 구성되며 하원의 법안을 검토하고 수정한다. 하원은 잉글랜드의 실질적 입법 기관으로서, 국민의 직접 투료에 의해 선출되고 정부를 구성하며, 입법 활동을 주도한다. 총리는 다수당의 지도자가 되며, 실제적 정부 수반으로서 내각을 구성하고 국가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 내각은 총리가 임명한 주요 장관들로 구성되며 국가의 다양한 부서를 관리한다. 주요 정당에는 보수당(Conservative Party), 노동당(Labour Party), 자유 민주당(Liberal Democrats), 스코틀랜드 국민당(SNP) 등이 활동한다. 잉글랜드의 사법부는 영국 최고의 법원으로 최종적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Supreme Court)이 있다. 대법원은 법률 문제와 상소 사건을 다루며 법률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등법원(High Court)은 다양한 사건(민사,형사)을 다루는 퀸즈벤치 부서(Queen`s Bench Division), 상업과 재산관련, 상속, 신탁을 다루는 찬셀러 부서(Chancery Division), 이혼, 자녀 양육 등 가정문제를 다루는 가정법원(Family Division) 등 3개의 부서로 구성되었다. 또한 경미한 범죄와 간단한 민사를 다루는 지방 법원(Magistrates` Courts)과 중범죄를 다루는 형사 법원(Crown Court)이 있다.
- 잉글랜드의 경제
잉글랜드의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경제 중 하나이며 다양한 산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4년 기준, 영국의 GDP는 약 3조 달러로서 세계 6위권 경제 규모이다. 경제구조는 서비스 산업이 약 80%, 제조업이 10%, 농업이 GDP의 약 1%를 차지한다. 잉글랜드는 금융, 관광, 교육, 헬스케어 등 서비스 산업이 경제의 중심이며 런던은 세계적 금융지로 알려졌다. 제조업은 자동차, 항공우주, 제약, 식음료 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주요 수출품은 기계, 장비, 자동차, 약품, 화확제품이며, 주요 수입은 기계, 장비, 원자재, 식료품 등이다. 잉글랜드의 경제는 글로벌화와 기술 발전에 적응하며 성장하고 있으며 2020년, 브렉시트 이후, 경제가 주춤하였지만 다양한 도전속에서 다시 성장하고 있다.
- 잉글랜드의 교육
잉글랜드의 교육 체계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었으며 공립과 사립 학교들이 혼재되어 있다. 5세까지, 어린이집(Nursery)과 유치원(Pre-school)을 통해 유아 교육(Early Years Education)이 이루어지며, 5~11세까지 공립과 사립 학교를 통해 초등교육이 진행된다. 5~7세는 Key Stage 1, 7~11세는 Key Stage 2로 나누어 진행된다. 중등교육은 11~16세까지이며 Key Stage 3(11~13세), Key Stage 4(14~16세)로 나누어 진행되며 이 단계의 끝에서 GCSE(General Certificate of Secondary Education) 시험을 친다. 16세 이상의 학생들(Post-16 Education)을 대상으로 A-level(Advanced Level) 과정과 직업 교육(Vocational Education)을 선택, 공부할 수 있으며, A-level은 대학 진학을 위한 중요한 자격증이다. 18세 이상은, 고등 교육으로 전문 대학과 대학의 학사, 석사, 박사 과정으로 진행된다. 잉글랜드의 유명한 대학으로는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 케임브리지 대학교(Cambridge University), 런던 정경 대학교(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mperial College London), 에든버러 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등 각기 다른 특성과 강점을 가진 여러 대학들이 있으며 국제적으로 매우 인기가 높다. 교육은 3년에서 4년 과정이며 다양한 전공을 제공한다. 잉글랜드의 교육 제도는 전통과 현대화가 잘 접목되었으며 전 세계의 많은 유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3. 잉글랜드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잉글랜드의 유적지
잉글랜드는 오랜 역사만큼 다양하고, 아름답운 역사적, 문화적 유적지들이 많다. 윌트셔(Wiltshire)에 위치한 스톤헨지(Stonehenge)는 3천년에서, 2천년전에 세워진 거석이며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런던에 위치한, 11세기에 세워진 런턴 타워(Tower of London)는 왕실의 궁전, 감옥, 창고의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왕관 보석이 보관되어 있다. 런던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은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로서 잉글랜드 왕실의 대관식, 장례식 등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행사들이 열리는 곳이며 많은 잉글랜드의 유명 인사들이 묻혀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의 기원은 7세기이며, 현재의 고딕 양식은 1245년 에드워드 1세가 건설을 시작하여 1517년 현재의 사원이 완공되었다. 잉글랜드의 남서부, 사우샘프턴(Southampton)과 브리스틀(Bristol) 사이의 바스(Bath)에 위치한 로마 시대의 온천과 조지아 시대(Georgian era)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조지아 시대는 1714년부터 1830년까지, 조지 1세(George 1)부터 조지 4세 (George 4)까지 통치 기간을 말한다. 이때의 건축물은 고전적이고 대칭적인 양식이 특징으로서 바스, 브리스틀에 아름다운 테라스 하우스와 공공 건물들이 많이 건축되었다. 잉글랜드 북부의 하드릭 성(Hadrian`s Wall)은 117년경, 로마 제국이 잉글랜드 북부를 방어하기 위하여 건설한 성벽이다. 웨일스 북부의 카너번 성(Caernarfon Castle)은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정복하기 위하여 세운 성으로서 중세 고유의 건축양식이다. 잉글랜드 남부 해먼프셔(Hampshire)주에 위치한 윈체스터에는 윈체스터 대성당(Winchester Cathedral)이 있다. 이 성당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긴 성당이며 고딕과 노르만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이 외에도 잉글랜드에는 많은 역사적 유적지들이 있으며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와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 잉글랜드의 자연 경관
잉글랜드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인정받는 아름다운 명소들이 많다. 먼저, 잉글랜드 북서부의 컴브리아(Cumbria)주에 위치한 레이크 다스트릭트(Lake District)는 아름다운 호수와 산으로 이루어진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국립 공원이다. 이곳은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에게 영감을 준 장소이기도 하다.
잉글랜드 남서부의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에 위치한 코츠월드(Cotswolds)는 전통적 시골 풍경, 푸른 언덕과 아름다운 마을들이 있다. 잉글랜드 남 중부에 위치한 옥스퍼드셔(Oxfordshire)주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가 있고 역사적 건축물과 전통적 시골 풍경, 아름다운 여러 공원과 자연보호 구역이 있다. 잉글랜드 남서부에 위치한 드본과 콘월(Devon and Cornwall)은 낭만적 해안선, 절벽,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하다. 특히 길이 1,014km의 크스탈 워크(Cornish Coastal Path) 구간은 독특한 풍경으로 유명하다. 잉글랜드 남서부의 데본(Devon) 주에 위치한 다트무어(Dartmoor)는 광활한 고원 지역의 국립 공원으로 산, 강, 바위 등 자연 그대로의 경치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또한 데본에는 로마 시대와 중세 유적지들도 많다. 잉글랜드 동부의 노퍽(Norfolk) 주에 위치한 노퍽 브로드스(Norfolk Broads)는 많은 호수, 수로가 있는 자연 보호 구역이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노퍽주에는 노리치 대성당(Norwich Cathedral)과 노리치 성(Norwich Castle)등으로도 유명하다. 잉글랜드 중부의 워릭셔(Warwickshire)주에 위치한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포드 어폰 에이본(Stratford-upon-Avon)에는 에이본 강을 따라 평화로운 시골 풍경과 전통적 마을들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적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다. 에이본 강은 워릭 시내를 가르지르며, 에이본 강이 흐르는 그 도시의 북쪽 끝에는 정원으로 이루어진 중세의 워릭 성(Warwick Castle)이 있다. 잉글랜드의 남동부의 켄트(Kent) 주에 위치한 슬램덴스의 바위 절벽(White Cliffs of Dover)은 도버의 백색 절벽으로 유명하며 잉글랜드의 상징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 잉글랜드의 특이한 축구 관광
잉글랜드는 축구로 유명하며 축구에 관한 관광으로도 유명하다. 잉글랜드는 신사들이 축구를 하는 나라이다. 잉글랜드 축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스포츠 중 하나이다. 잉글랜드는 축구의 기원지, 종주국이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축구에 대한 기록은 B.C.2세기 중국에서 "쭈"라는 공놀이가 발견되며, 고대 그리스는 "에피스키로스"로, 고대 로마는 "하르파스툼"으로 소개되는데 모두 공을 차는 형태이다. 중세 영국과 유럽에서도 비슷한 공놀이가 유행하였다. 현재의 축구 규정은 19세기 중반, 잉글랜드에서 시작되었으며 1863년, 잉글랜드 축구 협회(Football Association, FA)가 설립되었다. 이 협회에서 현대 축구의 규칙인 "축구 법"이 제정되었다. 20세기 초반부터 축구는 유럽과 다른 대륙으로 빠르게 번져나갔으며 국제 대회가 개최되기 시작하였고 1904년 국제 축구 연맹(FIFA)이 설립됨으로서 축구는 세계적 스포츠로 자리매김 하였다. 1930년 첫 FIFA 월드컵이 우루과이에서 개최되어 총 13개 팀이 참가하였다. 남자 축구 종목으로 1900년 파리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첫 경기가 1900년 5월 20일, 프랑스와 벨기에 팀 간에 이루어졌으며 우승은 프랑스의 USFSA가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Premier League)가 설립되어 현재 20개의 클럽이 참가하고 있으며 한국 선수들도 대거 진출하고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Manchester United)에서 박지성(Park Ji-sung)이 활약하였고, 토트넘 홋스퍼(Tottenham Hotspur)에서는 이영표(Lee Young-pyo) 선수가 활약하였다. 또한 현재 토트넘에서는 손 흥민(Son Heung-min) 선수가 월드클래스(World Class)로 활약중이며, 울버햄프턴 원더러스(Wolverhampton Wanderers)의 황희찬(Hwang Hee-chan)이 활약하고 있다.
축구는 잉글랜드 사회에서는 지역 사회의 자부심을 강화하고 연대감을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스포츠로서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잉글랜드는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 다양한 유적지로 가득한 나라이며 신사들이 축구하는 나라로서 세계적인 축구 리그와 팀들을 보유한 축구의 종주국이다. 런던, 에든버러, 맨체스터와 같은 대도시들은 경제와 교육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잉글랜드(Eng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웨일스(Wales),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의 네 개의 서로 다른 국가들이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고 함께 어우러져,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지금의 "잉글랜드와 북 아일랜드 연합왕국"을 형성하였다. 잉글랜드는 이러한 독특한 문화와 전통, 오랜 역사를 통한 정치적, 막강한 경제력으로 전 세계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나라이며 세계 문화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