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나이의 정식 명칭은 네가라 브루나이 다루살람(Negara Brunei Darussalam)이다. 말레이어로 네가라는, 국가를 뜻하며 브루나이는 국가 이름, 다루살람은 아랍어로 평화의 거처란 뜻이다. 따라서 네가라 브루나이 다루살람은 평화로운 브루나이 왕국이란 의미이다. 브루나이(Brunei) 명칭은 말레이어와 고대 역사적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말레이어와 관련된 고대 전설에서 초기 브루나이 정착민들이, 이 나라에 도착하여 풍요롭고 아름다운 땅을 보고 바루..나(Baru nah!)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말레이어의 바루나는 이제야 찾았다!는 뜻이다. 말레이어로 브루나이는 평화롭고 번영하는 국가라는 뜻으로서 바루..나가 변형되어 지금의 브루나이로 불려졌고 전해진다. 또하나, 역사적 의미에서 브루나이는, 초기 정착민들에의해 바루나이(Barunai)라 불려졌으며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의 바루나(Varuna)에서 파생되었다. 바루나는 힌두교의 바다 신이며, 이러한 이름은 브루나이의 해양 무역과 바다와 연관되어 불려졌다고 전해진다. 14세기 이후 브루나이에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다루살람(Darussalam)이 추가되어 평화의 거처라는 뜻을 더하여 불려지고 있다. 브루나이의 공식 언어는 말레이어(Malay)로서 표준 말레이어(Bahasa Melayu)와 조금 다른 브루나이 말레이어가 사용된다. 또한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영어는 교육, 비즈니스, 정부, 행정 업무 등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브루나이는 이슬람 국가이므로 아랍어를 종교적, 교육적 목적으로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계 이민자들인 화교가 많아서 중국어도 일부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여러 소수 민족들이 각자의 토착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1. 브루나이의 영토와 인구
총 면적이 5.765 제곱킬로미터의 작은 나라 브루나이는, 보르네오 섬 북서부에 위치하며 남중국해와 접해있다. 육지로는 말레이시아의 사라왁(Sarawak) 주와 경계를 이루며 해안선은 161km의 남중국해와 경계를 이룬다. 2023년 기준 브루나이 총 인구는 44만 5천명이며 수도는 강을 따라 위치한 도시 반다르스리브가완(Bandar Seri Begawan)으로서 행정,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다. 수도의 면적은 총 100 제곱킬로미터이며 수도에는 10만명 정도가 살고있다. 브루나이의 영토 면적은 작지만 석유, 천연가스가 풍부하여 경제가 안정되어있고 생활 수준 또한 높다. 2023년 기준, 브루나이의 인종 비율은 말레이계가 65~70%, 중국계가 15~20%, 토착 원주민(Indigenous)이 5~10%, 기타 인도, 필리핀계가 5% 정도이다.
2. 브루나이의 역사
- 브루나이의 역사
브루나이의 역사는 고대와 초기 왕국, 이슬람과 브루나이 왕국, 식민지 시대, 독립과 현대로 구분된다. 브루나이에 사람이 정착한 시기는 대략 B.C.2.000년에서 1.000년 사이로 추정된다. 초기 정착민들은 말레이어족에 속한 말레이계이며 이들은 말레이인(Malay) 또는 말레이족(Malays)으로 분류된다. 말레이족은 동남아시아의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있는 민족 집단이며 브루나이는 이들 말레이계의 초기 정착지중 하나였다. 초기 원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을 기반으로 성장하였고 해양 무역에 능통하여 해상 왕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7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을 중심으로 존재하였던 스리비자야 왕국(Srivijaya)과 연결되어 스리비자야 왕국의 해양 무역의 거점이었으며 이로인해 브루나이는 해양 왕국으로의 기반을 다지게되었다. 10세기경에 기록한 중국의 사서(송서)에는 브루나이가 해양 왕국들과의 활발하게 교류가 이루어진 해양 국가로 소개된다. 송서에는 10세기의 해상 무역과 동남아시아의 여러 왕국들을 소개하면서 브루나이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필리핀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던 중요한 해양 세력으로 소개한다.
14세기의 브루나이는 인도네아시를 광범위하게 지배하였던 마자파히트 제국(Majapahit Empire)의 영향을 받으면서 해상 무역의 거점으로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15세기, 부루나이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통하여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이슬람 국가로서 정체성을 갖게되었을뿐 아니라 이스람 술탄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브루나이는보르네오 섬, 말레이 반도, 필리핀 일부(현재 민다나오 섬의 다바오, 마긴다나오)를 포함한 광범위한 영토를 지배하였고 강력한 해상 왕국으로 성장하여 갔다. 1511년, 말레이시아 남부에 위치한 말라카 왕국(Malacca Sultanate)을 정복한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브루나이와 충돌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동남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브루나이의 무역로를 독점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518년 포루투칼과 브루나이는 첫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이 승리하게 된다. 이 전투로 인하여 브루나이는 포르투갈의 완전한 지배는 받지 않았지만 브루나이 술탄국의 여러 지역에서 포르투갈이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1565년, 스페인은 마젤란의 항로를 따라 동남아시아를 식민지화하려 하였고 브루나이는 스페인에 저항하여 충돌하게 되었다. 스페인과 브루나이의 전투로 인해 브루나이의 국력은 더욱 쇠퇴하였지만 스페인은 브루나이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1578년, 포르투갈과 브루나이는 다시 충돌하였다.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무역을 시작하였으며 브루나이와도 무역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브루나이는 포르투갈이 무역을 독점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네델란드와 교류를 통하여 이를 해결하려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포르투갈은 브루나이를 침략하게되었으며 브루나이는 해상전투에서 포르투갈을 잘 막아내어 승리할 수 있었다. 1582년,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는 과정에서 브루나이 술탄국을 공격하였다. 브루나이는 이러한 스페인에 맞서 싸웠지만 큰 피해만 입고 패배하였다. 브루나이는 필리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때문에,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지만 브루나이가 신경쓰였다. 그래서 브루나이가 필리핀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하기 위하여 브루나이를 공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루나이는 왕위 계승으로 인해 귀족들의 분열이 일어났으며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어 왕국의 통치력은 약화되었다. 16세기 후반에는 영국과 네델란드와 같은 유럽의 열강들이 동남아시아와 브루나이에 등장하면서 점차 경제적, 군사적 압박을 더욱 크게 받게되었다. 1609년, 스페인은 브루나이의 해상 무역과 영토 확장을 막기 위하여 브루나이를 여러번 공격하였다. 이 전쟁은 부루나이 해전(Battle of Brunei)로 알려졌다. 스페인은 해안선을 끼고있는 부르나이의 수도 브루나이 시티(Brunei City)를 공격하였지만 브루나이는 스페인군을 여러차례 방어하며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1613년, 네델란드(동인도회사) 또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무역로 확장과 식민지 정책으로 브루나이를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브루나이는 네델란드를 잘 막아냈다. 1660년, 당시 자바 섬(인도네시아)를 지배하였던 마르타 왕국(Mataram Sultanate)이 브루나이를 침략하였지만 브루나이는 어렵게 방어하게 되었다. 여러차례의 전쟁과 내부 분열로 인하여 국력이 약해진 브루나이는 마르타 왕국을 막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침략을 저지할 수있었다. 17세기 중반의 브루나이 왕국은 여전히 강력한 해상 왕국이었지만 마르타 왕국,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델란드와의 계속된 전쟁으로 브루나이의 해상 군사력은 점차 약해졌으며 중앙 집권적 왕의 권력 또한 약화되었고 지방 세력이 강성해졌다. 또한 영국도 브루나이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서 브루나이는 더욱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과는 직접적 충돌없이 주로 무역 협정을 통해 상호 관계를 이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국력또한 외교적 독립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약해졌으며 필리핀 제도와 보르네오 섬에 관한 영토가 축소되었다. 18세기 초, 필리핀을 강력한 식민지로 삼은 스페인은 브루나이 왕국의 보르네오 섬 또한 식민지로 삼으려 하였다. 브루나이 왕국은 이러한 스페인의 침략을 막기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18세기 초, 마르타 왕국은 더욱 강력한 해상 왕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자바 섬(현재 인도네시아의 자바)의 해상 패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브루나이 왕국에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압박을 가하였다. 18세기초, 네델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브루나이와의 무역을 통해 압박을 하였고 브루나이는 상업적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외교적 노력을 다하였다. 또한 18세기 초 영국은 보르네오 섬과 브루나이에 대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무역과 산업에 브루나이의 경제적 의존성은 점점 높아져 갔으며 결국 1888년, 브루나이 왕국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17, 18세기 200년동안 브루나이는 유럽의 여러 강대국들과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마르타 왕국과도 정치적, 군사적 마찰은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 왕권은 쇠퇴하였고 지방 세력들의 권력은 강화되었다. 결국 18세기 말, 브루나이는 외세의 침략, 내부의 분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영토와 국력은 계속 축소되고 약화되었다. 네델란드와 영국의 상업적 팽창, 포르투갈과 마르타 왕국과 스페인의 군사적 압박은 브루나이 왕국이 쇠퇴해가는 과정에서도 계속되었다. 결국 보르네오 섬에서의 브루나이의 영토와 영향력은 축소되었고 영국은 브루나이를 영국의 보호국으로 삼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19세기 초, 영국은 보르네오 섬의 석유, 천연 가스, 고무, 사탕수수, 광물 자원의 개발을 통해 브루나이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해 나갔다. 당시 보르네오 섬에는 사바(Sabah), 살라와트(Sarawak)와 같은 다른 국가들이 성장하면서 브루나이 왕국의 영토는 더욱 축소되었다. 1840년, 영국의 상인이었던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사라왁(지금의 말레이시아 일부) 지역을 자신의 왕국이라 선언하여 영국의 지원아래서 독립적인 나라로 분리되었다. 당시 사라왁은 브루나이 왕국의 영토였다. 브루나이는 이러한 사라왁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영국은 제임스 브룩을 통해 사라왁에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국력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브루나이 왕국은 19세기 후반에도 계속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갈등으로 혼란을 겪고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88년, 브루나이는 영국과 보호국 협정을 체결함으로서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로인하여 브루나이 왕국은 정치적, 외교적으로 영국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다. 영국의 보호국 지위아래 놓인 브루나이는, 왕국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왕위 계승 문제와 지방 세력의 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1906년, 브루나이는 영국과의 협정을 통해 일정부분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의 보호국 지위에 있었다. 1929년, 영국은 브루나이에서 석유를 발견하여 경제적 번영이 이루어졌다. 석유는 브루나이 경제의 핵심 자원이 되었고 영국은 석유 개발을 통하여 브루나이와의 경제적 관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 2차 세계 대전 동안 브루나이는 일본의 침략을 받았으며 영국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채 일본에 맞서 싸워야 했다. 보르네오 섬과 브루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보르네오 섬의 석유 자원을 전쟁에 활용하였다. 일본군의 보르네오 섬과 브루나이 점령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로인하여 브루나이 주민들은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일본군에 저항도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브루나이는 다시 영국의 통제아래 놓였으며 영국의 보호국으로서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1959년 9월 29일, 브루나이는 영국과 협약을 통해 자치권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브루나이 공화국 자치 정부가 수립되어 브루나이 왕국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입법 기관, 국회가 설립되었고 국회 의원들이 선출되었으며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국방과 외교는 여전히 영국의 책임아래 놓였다. 1967년, 브루나이는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준비하였으며 1984년 1월 1일, 브루나이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브루나이 다루살람(Negara Brunei Darussalam)이라는 독립 국가가 시작되었다. 21세기의 브루나이는 왕실 중심의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면서 석유와 천연 가스 수출을 통하여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높아졌다. 독립 후 브루나이 왕국은 무슬림 왕국으로서 중동 지역의 정치, 경제 체제와 연결되어 이슬람 국가로서의 입지 또한 더욱 다지게 되었다. 현대의 브루나이는 절대 군주제 국가로서 술탄 하사날 볼키아가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 경제, 외교, 종교적 전권을 행사하고 있다.
- 브루나이의 경제
브루나이의 경제는 석유와 천연 가스에 크게 의존한다. 석유와 천연 자원이 풍부한 브루나이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부강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으며 GDP의 약 70~80%가 석유와 천연 가스 산업에서 발생하고 있다. GDP는 2023년 기준, 197억 달러로서 세계 100위권 경제 규모이며 1인당 GDP는 4만 5천달러이상으로 세계 5위권에 해당한다. 브루나이는 천연 자원의 고갈을 대비하여 경제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특히 금융 서비스, 관광업, 농업에 관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3. 브루나이의 관광지
브루나이는 고대 왕국과 여러 자연적 문화가 어우러진 멋진 여행지이다. 반다르 세리 베가완(Brunei`s capital city)에 위치한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모스크(Sultan Omar Ali Saifuddien Mosque)는 브루나이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황금돔, 아름다운 정원으로 구성된 대형 모스크이며 저녁에 불이 켜지면 더욱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다르우르 리자야 공원(Taman Perayaan)은 브루나이 왕국과 왕실의 문화와 전통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부르나이 박물관(Brunei Museum)에는 브루나이의
역사, 문화, 전통, 석유 산업에 관하여 전시해 놓았다. 브루나이 남부에 위치한 450m의 키리시르 산(Bukit Shahbandar)은 브루나이의 열대우림과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하이킹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반다르 세리 베가완에 위치한 탐포른 툰 사림 빌리지(Kampong Ayer)는 수상마을로서 수백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제이알 술탄 하시날 볼키아 공원(Jubilee Park)은 브루나이 왕실의 5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슬람 박물관(Islamic Museum)은 이슬람 문화와 예술을 중심으로 전시되었다. 특히 중동과 아시아의 이슬람에 관한 자료가 많으며 보석과 전통적 옷과 같은 유산들도 전시되었다. 반다르 세리 베가완에 위치한 라맛 그라운드(Rimba Garden)은 다양한 열대 식물과 꽃으로 유명한 정원이며 온수의 수도원(The Royal Regalia Museum)은 브루나이 왕국의 왕실 유물과 왕관, 의복 등이 전시되어 있다. 브루나이 서부에 위치한 탄드 리아망 보호구역(Tasek Merimbun)은 아름다운 타색 메림분 호수(Tasek Merimbun)로 유명하며 1,000m 높이의 부킷 테라자(Bukit Teraja) 산으로도 유명하다.
브루나이는 작지만 강한 나라이며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600년 이상의 왕실 역사를 자랑한다. 또한 종교법인 샤리아 법을 국가의 법률 체계에 통합한 나라이며 도덕적, 사회적 범죄에 대하 처벌은 엄격하고 동성애, 도박과 같은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브루나이 왕실 프로젝트 중 하나는 왕실 농장에서 자라는 하늘을 나는 망고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망고의 향이 강하고 독특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왕실의 축제나 행사에서 이 망고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브루나이의 특징 중 하나는 탈옥이 불가능한, 40m 높이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도소 벽을 가지고 있다. 브루나이는 그들의 고요하고 조용한 생활을 보호하기 위하여 비자가 까다롭고 관광에 대한 정책이 엄격하다. 따라서 브루나이에는 관광객이 많지 않으며 관광 산업이 상당히 제한적인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