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시국(Vatican City)의 정식 명칭은 이탈리아어로, 스타토 델라 치타 델 바티카노(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이며, 라틴어로는 스타투스 키비타티스 바티카나이(Status Civitatis Vaticanae), 영어로는 스테이트 오브 더 바티칸 시티(State of the Vatican City)이다. 바티칸(Vatican)은 고대 로마 시대에 존재했던 바티카누스 언덕(Vaticanus Mons`)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바티카누스는 고대 로마의 예언자 바테스(Vates)에서 유래된 이름으로서 바티카누스 언덕은 점술과 신탁의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시국(City-State)이란, 바티칸의 도시 전체가 하나의 독립적 주권국가로 기능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며 주권 국가이다. 바티칸 시국은 다국적 특징으로 인하여 종교적 언어, 공식 언어, 외교와 일상적 언어에 따라 다양한 언어로 불려진다. 종교적이고 공식적 언어로는 라틴어인 스타투스 키비타티스 바티카나이가 사용되며, 일상적 언어로는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관계로 이탈리아어로 스타토 델라 치타 델 바티카노라 불려진다. 또한 외교 및 국제적 종교 행사에서는 주로 영어인 스테이트 오브 더 바티칸 시티로 불려진다.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려진 것은, 바티칸 시국이 전 세계 10억명 이상의 카톨릭 신자를 대표하는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적이고 다국적 특성으로 인하여 바티칸 시국은 여러 언어로 소통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이름으로 불려졌다. 따라서 바티칸시국의 공식언어는 라틴어, 이탈리아어, 영어가 주로 사용되며 그 외에도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된다. 라틴어는 교황청의 문서와 종교 의식에서 주로 사용되며, 일상적 생활에서는 이탈리아어가 사용된다. 이것은 바티칸시국이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관계로 현지 주민과 근무자 대부분이 이탈리아어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영어는 세계적 외교무대와 종교적 의사 소통을 위하여 사용되며 이 외에도 교황청 내부에서는 다국적 성직자들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1. 바티칸시국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바티칸시국의 영토와 수도
바티칸시국의 영토는 약 0.44 제곱킬로미터로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면적을 가진 나라이다. 이것은 서울 여의도의 1/6 정도의 크기로서 이탈리아 로마 시내에 위치하며 로마에 완전히 둘러싸여있다. 주요 영토는 성 베드로 대성당과 그 주변의 건물들로 이루어져있다. 주요 시설물과 지역은 세계 최대 교회 건출물 중 하나인 성 베
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광장, 교황의 거처와 교황청의 행정 중심지인 바티칸 궁전,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 있는 시스티나 성당, 0.23 제곱킬로미터의 바티칸 정원, 세계적 유물을 소장한 바티칸 박물관이 있다. 또한 외곽 영토에는 교황청의 공식 대성당인,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이 있으며 이탈리아 전역과 세계에 있는 수도원과 성당들은 모두 바티칸의 소유로 간주된다. 로마의 바티칸시국은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몇 개의 출입구로만 진입 가능하다. 바티칸시국은 그 자체가 수도이며 독립적 국가로서 전체 인구는 2023년 기준, 약 800명이 거주한다. 이들 인구는 대부분 카톨릭 성직자들, 수도자들, 교황청 직원들로 구성되었으며 외교 사절단과 방문자들도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바티칸시국의 국민들은 대부분 바티칸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며 바티칸시국에 상주하는 시민은 극히 제한적이다. 바티칸시국의 면적은 세계에서 가장 작지만 그 상징성과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친다. 바티칸시국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심지로서 세계의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는 작지만 거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바티칸시국은 작은 도시이지만 독립적 정부와 주권을 가진 국가이다.
- 바티칸시국의 인구와 인종
바티칸시국의 인종 비율은 다양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주민은 이탈리아인으로서 60~70%정도 차지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의 성직자들과 교황청 직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독일, 프랑스, 스페인, 폴란드와 같은 유럽인들이 20~30% 정도, 미국, 필리핀, 남미 등 전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방문한 외교관, 직원들이 5~10% 정도이며 이들은 바티칸시국에 상주할 수 있다.
2. 바티칸시국의 역사, 정치, 경제
- 바티칸시국의 역사
바티칸시국의 역사는 초기 역사, 중세와 교황국, 근대와 바티칸시국의 재설립, 20세기와 현대로 구분된다.
바티칸시국의 기원은 성 베드로의 순교와 성 베드로 대성당과 관련되어 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명의 제자 중 한명으로서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베드로가 바티칸 언덕에 묻혔다고 전해지며 그 위에 현재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A.D.300년까지는 기독교는 극심한 박해을 받았다. 그러다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the Great)가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을 선언함으로서 기독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종교적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기독교의 박해는 중단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후원하였고 제 3회 니케아 공의회(325년)를 소집하여 여러 교리적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황제가 테살로니가 칙령을 선언함으로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 이 칙령에서 기독교는 진정한 종교로 선언되었으며 다른 종교들을 비합법적이라 선언하였다. 이것으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국교가 되었으며 다른 종교는 점차 억제되었다. 카톨릭에서 교황 칭호가 처음 사용된것은 590년대 이후이다. A.D.300년~600년에는 교황권을 두고 교회들(로마,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이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 로마 교회(로마)와 동 로마 교회(콘스탄티노플)가 있었다.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 교회도 제국의 위엄을 위해 로마 교회와 같은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주장하여 제 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통해 로마 교회와 같은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로마 대 감독 레오(A.D.440년~461년 재임)는 극렬히 반대하였다. 그리고 레오의 후임이었던 로마 대 감독 그레고리오 1세(A.D.590년~604년 재임)는 교회 수위권(교황권)을 거절하면서, 어떤 교회도 사제의 수위권을 부정한다고 선언하였다. 아버지라는 뜻의 파파(Papa)라는 단어가 이때부터 생겨났다하여 어떤 학자들은 그레고리오 1세를 교황으로 보기도 한다. 반면, 동로마 황제 마우리키우스(22대 황제)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콘스탄티노플 교회 대 감독 요한과 그의 후계자 키리아쿠스는 집요하게 교황권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사위이며 군대 백부장이었던 포카스(23대황제, A.D.602년부터 8년동안 통치)가 쿠데타(602년)를 일으켜 마우리키우스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포카스는 그의 아내와 아들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A.D.607년, 당시 서로마는 동로마 제국의 관할 아래 있었기 때문에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로마에서 대관식을 가졌고 동시에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선언과 함께 교회 수위권(교황권)을 로마 대 감독이었던 보니파시오 4세(A.D.607~615년)에게 수여했다. 따라서 초대 교황이란 호칭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607년, 포카스에 의해 교황으로 추대된 보니파시오 4세는 교황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당성을 확립하여야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포카스 황제와 서로 정치적, 종교적 밀약을 하게되었다. 이 밀약을 통하여 포카스는 황제의 권위를 교황을 통해 확립하게 되었으며 교황은 황제를 통해 교회의 권위를 얻게되었다. 여기서 교황이 세습된 것이 아니라 황제로부터 수여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카톨릭의 교황 역사의 시작이다.
610년, 포카스 황제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헤라클리우스(군단장)가 소아시아 지역에서 군사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여 포카스를 처형한 후 황제로 즉위하였다. 755년, 서로마는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지배아래 간섭 받고 있어고, 이슬람 세력이었던 우마이야드 칼리프국(Umayyad Caliphate)의 침략과 이탈리아 북서부 지역의 롬바르드족(게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때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Pepin the Short, 카롤 대제 부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711년부터 우마이야드 칼리프국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스페인)를 침략하여 프랑스를 넘어 이탈리아와 로마까지 위협하였다. 이때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으로 피핀 3세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우마이야드 칼리프국 군대를 격파하였고 또한 롬바르드족 군대까지 모두 물리쳤다. 그리고 이때 피핀 3세는 교황 스테파노 2세와 피핀의 기부(Pippin`s Donation)라는 협정을 맺고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을 기부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와 중부이탈리에는 교황령(Papal States)이 세워지게 되었으며 교황은 로마와 그 주변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756년부터 교황직의 세속적 권위와 영적 권위가 결합된 형태로 교황령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교황국(교황청)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교황령의 역사는 이후 1천년 동안지속 되었으며 교황직은 영적 지도자 이상의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게되어 독립 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는 피에몬트 왕국(Piedmont-Sardinia), 두 시칠리아 왕국, 토스카나 대공국, 교황령 등 여러 독립적인 왕국, 공국,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이탈리아는, 리구리아 공국의 평민 출신인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피에몬트 왕국의 총리였던 카밀로 디 카보르(Camillo di Cavour) 등과 같은 민족주의자들에 의하여 여러 지역에서 통일에 대한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피에몬트 왕국의 카밀로 디 카보르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859년, 이탈리아 북부를 피에몬트 왕국에 병합하였다(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 1860년, 평민 출신의 주세페 가리발디는 그가 이끄는 붉은 셔츠(Garibaldi`s)를 입은 병사들과 함께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였다. 그는 두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기 위하여 자원병들을 모집하였고 이때 1천명의 자원병들이 지원하여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상징으로 붉은 셔츠를 입고 진격하여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였다. 이것은 남부 이탈리아를 통합하는 계기가 되어 후에 이탈리아 왕국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에서 로마의 교황령은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1861년, 피에몬트 왕국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왕국의 첫 번째 왕이 되면서 피에몬트 왕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되었다.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때 교황의 군대는 극렬하게 저항하였지만 결국 로마는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이것은 이탈리아 통일의 마지막 단계로서 로마는 공식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교황은 교황청에 고립된 처지에 놓였지만 세계 카톨릭 신자들에게 교황은 여전히 영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로 남았다. 1870년, 교황 비오 9세는 제 1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를 소집하여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무류성(infallibility)을 선언하였다. 교황 무류성 교리(Papal Infallibility)는 교황의 말과 교리는 전혀 오류없이 결정을 내린다는 선언으로서 절대적인 교황의 영적 권위를 명확히 규정한 교리이다. 따라서 교황은 카톨릭 세계의 최고 권위자, 지도자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1870년대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청 사이에 정치적 긴장이 생겨났다. 교황령을 잃은 교황은 정치적 독립성을 주장하였으며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2월 11일,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정부와 교황청의 교황 비오 11세(Pope Pius XI) 사이에 라테라노 조약(Lateran Treaty)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의 주권을 인정하고, 바티칸시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였다. 이 조약에서 바티칸시국은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중심으로 영토를 얻게되었으며 교황의 세속적 통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21세기의 바티칸시국은 전 세계 카톨릭 신자들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탈리아와의 관계도 정상화되었다. 바티칸시국은 여전히 종교적 영향력을 전 세계에 미치고 있으며 국제 정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바티칸시국의 정치
작은 거인, 바티칸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가이며 카톨릭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이다. 바티칸시국의 정치 체제는 교황을 중심으로한 절대 준주제이다. 교황은 바티칸시국의 국가 원수이며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국가의 정치와 종교적 권한을 동시에 수행한다. 교황은 정부의 지도자로서 바티칸시국의 모든 종교적 교리와 국가의 법률, 정치적 결정을 모두 지도하고 수행한다. 바티칸시국의 정부 구조는 교황을 중심으로 교황청(Holy See)과 비서실, 외교부, 주교회 등 여러 행정 기관들이 있다. 교황청은 교황을 보좌하는 행정기구이며 바티칸시국의 행정과 외교적 역할을 수행한다. 교황청의 공식적 의회는 존재하지 않지만, 교황은 여러 기관들의 자문을 통해 종교적, 법률적, 정치적 의사를 결정한다.
- 바티칸시국의 경제
바티칸의 경제구조는주로 관광업이 발달되어 있다. 바티칸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적 중심지로서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따라서 관광업은 바티칸시국의 경제에 큰 기여를 하고 있으며 또한 전 세계의 카톨릭 신자들로부터 받는 기부금은 바티칸 시국의 중요한 재정 자원이 된다. 이러한 기부금을 통해 교회를 운영하고 사회 복지, 종교 교육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교황청은 세계 많은 나라들과의 금융 협력을 통해 여러 국제적인 투자를 받고 있으며 이와함께 부동산 투자, 금융, 자산 관리 또한추가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 바티칸시국의 GDP는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
3. 바티칸시국의 유적지와 자연경관
- 바티칸시국의 유적지
바티칸시국의 나라는 작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관계로 여러 종교적, 역사적 유적지들이 있다. 베드로의 무덤위에 건축되었다고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인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은 바티칸시국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르네상스 건축물로서 피에타상 등으로 유명하며 매년 교황의 미사가 이곳에서 거행된다.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은 미켈란젤로의 천장화(Sistine Chapel Ceiling)가 있는 곳으로서 교황 선출을 위하여 콘클라베(Papal Conclave)가 열리는 곳이다. 이곳의 천장화는 천지창조, 아담의 창조, 최후의 심판 등 미켈란젤로의 대표작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티칸 박물관(Vatican Museums)에는 다양한 고대 유물과 르네상스 미술, 중세 미술 등 방대한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라파엘 방에는 라파엘의 그림으로 장식된 여러 방들로 이루어져 라파엘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 베드로 광장(St. Peter`s Square)은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위치한 광장으로서 교황의 대중 미사와 특별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바티칸 정원(Vatican Gardens)은 교황과 교황청 직원들만 갈 수 있다. 정원에는 종교적 조각물과 고대 유적지와 여러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성 안젤로 성(Castel Sant`Angelo)은 고대의 성으로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무덤으로 사용되었으며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황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황청 도서관(Vatican Library)에는 고대 문서와 중세 문헌, 예술 작품, 성경, 교리서와 같은 종교적 문헌들이 소장되어있다.
- 바티칸시국의 자연 경관
바티칸시국은 대부분 인공적 구조물과 역사적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자연 경관은 매주 제한적이다.
0.23 제곱킬로미터의 바티칸 정원(Vatican Gardens)은 바티칸시국의 가장 중요한 자연 경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정원은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교황청 직원들만 접근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다양한 식물과 꽃, 조각상, 종교적 조각물과 고대 유물과 유적들로 배치되어 있다. 성 베드로 광장(St. Perer`s Square) 또한 인공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지만 광장 중앙의 이집트, 오벨리스크와 양쪽 콜로네
이드(기둥회랑)는 자연과 결합된 구조물로서 광장 주변의 정원과 나무들과 조화를 이룬다. 성 안젤로 성(Castel Sant`Angelo)은 티베르 강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낸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에 올라가면 바티칸시국과 로마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기도 한다.
바티칸시국은 자연경관 보다는 역사적 건축물과 종교적 상징성이 강조되는 나라이다. 바티칸시국은 종교적 중심지로서 기독교 역사와 예술의 유적지들이 집중된 곳이며,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의미를 가진 나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지만 그 영향력은 전 세계에 거대하게 미치는 거인과 같은 나라이다. 교황은 그냥 단순한 종교적 지도자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정치, 사회 문제(자유와 인권)와 연결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작은 나라 바티칸시국은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전 세계에서 거대하고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