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파도에 숨은 나라, 미크로네시아의 정식 명칭은 미크로네시아 연방(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 FSM)이다. 미크로네시아라는 명칭은 프랑스의 타험가 쥘 뒤몽 뒤르빌(Jules Dumont d`Urville)이 붙인 이름이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지리적 명칭을 붙일때 그리스어와 라틴어 사용이 유행하였다. 그것은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학문적 권위를 지닌 언어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831년, "뒤르빌"도 이러한 배경에서 그리스식 이름인 미크로네시아로 이름을 붙였다. "미크로(Mikros)"는 작다는 뜻이며 "네시아(nesos)"는 섬을 뜻한다. 이것은 미크로 네시아의 섬들이 작고 흩어져 있다는 지리적 특징을 반영한 이름이다. 이, 이름은 태평양의 서부 지역의 수천개 섬들을 묶어서 부르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태평양에는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이사, 멜라네시아라는 문화적, 지리적 지역들이 나누어져 있으며 주로 작은 섬들로 흩어져 있다. "뒤르빌"은 이러한 태평양의 섬들을 문화적, 지리적으로, 세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그것이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많은 섬들), 멜라네시아(검은 섬들)이다. "뒤르빌"이 분류한 이 지리적 세 지역을 유럽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공용어는 영어이며 정부, 교육, 상업, 행정, 비즈니스 등 중요 분야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또한 4개의 주에서는 각기 고유한 원주민들의 언어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다.
미크로네시아는 야프(Yap), 폰페이(Pohnpei), 추크(Chuuk), 코스라에(Kosrae)라는, 4개의 주(섬)과 2,100개가 넘는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독립적 연방 국가이다. 따라서 각 주(섬)마다 고유한 언어들이 사용된다. 주요 언어는 야프어(Yapese, 야프주에서 사용), 폰흔페이어(Pohnpeian, 폰페이주에서 사용), 추크어(Chuukese, 추크주에서 사용), 코스라에어(Kosraean, 코스라에주에서 사용)가 있다.
1.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영토와 수도, 인구와 인종
-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영토와 수도
태평양의 파도에 숨은 나라,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태평양의 서부에 위치한 2,100개가 넘는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연방 공화국(Federated States of Micronesia, FSM)이다. 섬나라인, 미크로네시아의 총 육지 면적은 702 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배타적 경제 수역(EEZ)은 약 2,978,000제곱킬로미터로서 광범위한 해양 영토를 가진 나라이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4개의 주로 구성되었으며 각 주는 여러 섬과 환초들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섬(주)은 야프(Yap State), 폰페이(Pohnpei State), 추크(Chuuk State), 코스라에(Kosrae State)가 있다. 야프 섬(Yap Island)은 큰 섬들이 많고, 폰페이 섬(Pohnpei Island)은 산들과 열대 우림이 많다. 추크 섬(Chuuk Island)은 많은 섬과 환초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코스라에 섬(Kosrae Island)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수도는 폰페이 주에 위치한 팔리키르(Palikir)이며 면적은 2.8 제곱킬로미터, 인구는 2023년 기준, 7천 5백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 미크로네시아 언뱡의 인구와 인종
2023년 기준,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총 인구는 10만명 정도이며 인종 비율은 미크로네시아인이 80%를 차지한다. 폴리네시아와 멜라네시아계가 10%, 필리핀, 중국, 일본 등 아시아계가 5%, 미국과 유럽의 백인계가 5%정도 차지한다.
2.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역사, 정치, 경제, 교육
-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역사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역사는 고대 원주민들의 이주와 정착, 유럽의 탐험과 식민지 시대, 일본의 식민지와 1, 2차 세계 대전, 미국의 신탁통치와 자치, 독립과 현대로 나누어 진다. 미크로네시아의 역사는 B.C.3000년에서 1000천년사이, 오스트로네시아계 사람들이 아시아의 여러 지역(말레이시아, 태국,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미크로네시아의 여러 섬들로 흩어져 부족 사회를 이루며 서로 동맹과 전투를 통해 각 부족의 문화와 전통을 발전시켰다. 고대 미크로네시아는 중앙 집권적 정치 구조를 가진 통일 왕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몇몇 섬들에서는 왕국(폰페이 왕국, 12세기 고대왕국)과 유사한 형태의 정치적 흔적들이 발견되지만, 통일 왕국의 형태는 아니었으며
좀더 규모가 큰 부족 국가로서 분산된 사회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519년부터 1521년사이, 스페인의 탐험가, 페르난도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필리핀으로 항해하는 도중, 미크로네시아를 탐험하여 유럽에 알리게 되었다. "마젤란"이 미크로네시아를 다녀간 이후 스페인 탐험가들이 계속 미크로네시아를 방문하고 탐험하였다. 1522년,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Juan Sebastian Elcano)가 미크로네시아를 탐험한 후 유럽에 보고하였고, 1527년~1529년사이 알바로 데 사베드라(Alvaro de Saavedra)가 미크로네시아를 방문하고 탐험하였다. 1565년, 후안 리카르트(Juan de Salcedo), 1595년, 루이스 벨트란(Luis de Velasco)이 차례로 방문하였다. 이처럼 미크로네시아에 대한 스페인의 관심은 적극적이었으며 자원과 해상 무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식민지 통제가 시작되었다. 1565년, 스페인 제국은 필리핀과 미크로네시아를 비롯한 태평양의 여러 섬들에 대하여 공식적 식민지로 선언하였으며 1580년대, 스페인은 미크로네시아에 대한 식민지 관리 체계를 확립하였다. 1600년대는 네델란드와 영국 등 유럽 열강들이 태평양 지역에 대한 식민지 확장을 위하여 탐험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로인해 미크로네시아는 해상 무역의 거점과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을 받게되었으며 특히 네델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큰 관심을 가졌다. 또한 이시기 식민지에 대한 자원 약탈과 통제 정책으로 인하여 스페인은 미크로네시아의 원주민들과 충돌하기도 하였으며, 유럽인들이 가져온 홍역과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미크로네시아의 인구 또한 감소하기도 하였다. 1600년대에는, 스페인의 카톨릭 선교사들이 미크로네시아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표적 선교사들은, 이그나시오 로드리게스(Ignacio Rodriguez, 1600년~1610년사이), 후안 파블로(Juan Pablo, 1620년), 프란시스코 바르셀로(Francisco Barcelo, 1660년)가 있다. 이처럼 스페인의 강력한 식민지 정책에 따라 미크로네시아에 대한 카톨릭의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미크로네시아에 개신교가 전해진 시기는 19세기 중반이다. 1840년대부터 미국, 영국, 독일 등 개신교 선교사들이 미크로네시아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 1852년), 조지 스미스(George Smith, 1857년)가 마셜제도와 미크로네시아, 카롤라인 제도를 오가며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독일 선교회 소속의 구스타프 이겐(Gustav Igen, 1860년)은 미크로네시아에 도착하여 교육과 의료를 통해 선교 활동을 하였다. 1870년대는 영국 선교사들(프레드릭 스토리, Frederick Story)이 미크로네시아, 마셜제도, 카롤라인 제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1880년, 국적과 소속이 알려지지 않은 자크 네트(Jacques Neat)가 미크로네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이로인하여 미크로네시아에서는 교육의 기회가 많이 주어졌으며 기독교 인구도 점차 확산되었다. 1884년 11월부터 1885년 2월까지, 유럽 열강들은 독일의 베를린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 분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베를린 조약(Berlin Conference, 1885년 2월)이 체결되었는데 이때 효과적인 지배 원칙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식민지로 삼기 위해서는 그 지역을 지배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원칙으로서 이를 통해 서로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다. 베를린 회의는 아프리카 식민지가 주된 내용이었지만, 독일과 스페인 사이에서는 미크로네시아에 대한 협상도 이루어져 독일은 미크로네시아의 일부 섬들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 베를린 회의 이후, 1898년 4월, 스페인 제국은 미국과 쿠바와 필리핀을 두고 전쟁을 하게되었다. 당시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미국은 쿠바의 독립을 지지함으로서 스페인과 미국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었다. 미국은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스페인을 감시하려고, 1898년 2월 15일, 쿠바의 하바나 항구에 미국 해군 전함(매디슨 호, Maine)을 파견하였다. 이때 미국 전함의 자체적 결함으로 전함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이를 빌미로 그해 4월, 미국은 스페인에 선전 포고를 하게된다. 그리하여 같은 해 8월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장은 주로 필리핀과 쿠바, 푸에르토리코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전쟁의 결과는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 같은해 12월 10일, 파리 조약(Tieaty of Paris)이 체결되어 스페인은 괌과 필리핀,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넘겨주었다. 미국에게 패배한 스페인 제국은 국력이 약화되어 더이상 식민지를 통제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이때 독일은 태평양 지역의 식민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이러한 독일에게 미크로네시아는 상업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해상 거점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스페인과 독일은 태평양의 여러 지역의 식민지를 두고 협상을 하였고 독일은 충분한 보상을 함으로서 마셜제도와 카롤라인 제도, 그리고 미크로네시아를 양도 받게 된다. 1899년 이후 독일은 미크로네시아의 여러 섬들을 식민지로 삼고 행정 체계를 구축하였으며 자원을 개발하였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전쟁중인 독일은 식민지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었다. 이때 태평양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던 일본이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미크로네시아를 점령하여 통치하게된다. 1918년 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미크로네시아는 일본의 위임 통치로 지정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1920년대부터 메크로네시아를 관리하며 군사 기지를 건설하고 자원을 착취하였다. 2차 세계 대전(1939~1945년)의 전범국이었던 일본은 미크로네시아를 비롯한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군사 기지로 사용하였다. 미국과 연합군은 태평양의 전세를 점하기 위하여 일본의 군사 기지들을 공격하여 점령해 나갔다. 그러한 과정에서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에서 벌어졌던, 과달카날 전투(Battle of Guadalcanal)는 아주 유명하다. 이 전투는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과달카날 섬(Guadalcanal Island)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였으며 미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사이판, 괌, 팔라우, 미크로네시아의 여러 섬들에 군사기지를 두고 과달카날로 보급선과 군사 물자를 지원했다.
미국과 연합군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해야 했다. 그리하여 섬들에 대한 점령 작전을 펼쳐서 태평양의 일본군 기지가 있는 섬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1944년 7월 21일부터 8월 10일까지 괌을 점령하였고, 1944년 6월 15일~7월 9일까지 사이판을 점령하였다. 같은해 8월과 9월에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여러 섬들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점령하였고, 9월 15일부터 11월 27일까지는 팔라우를 점령하였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승리한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전세를 바꾸게되었고 태령양의 많은 섬들을 장악한 미국은 결국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기지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난후 미크로네시아는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1947년, UN과 미국의 신탁 통치 조약(Trust Agreement)에 따라 미크로네시아는 1970년대까지, 미국의 신탁 통치(Trust Territory of the Pacific Islands)를 받게 되었다. 1970년대 초,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자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로 1979년 공식적으로 4개의 주에 자치 정부를 인정하는, 헌법을 책택하여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로인해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4개의 주(야프, 폰페이, 추크, 코스라에)로 이루어진 연방 정부로서 각 주는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다. 1986년에는 미국과의 자유 연합 협정(Free Association)을 통해 신탁 통치가 종료되었으며, 자치권을 확립하여 미크로네시아는 공식적 독립국가의 지위를 얻게되었다. 또한 미국은 자유 연합 협정에 따라 미크로네시아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경제를 지원하고 있다. 1991년 9월 17일 미크로네시아는 UN에 가입하여 정식 회원국이 되었으며 2003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중앙 정부의 권한을 일정 강화하여 각 주 정부의 자치권을 명확하게 하였다.
-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정치
미크로네시아의 정치는 대통령제가 기반이며 부통령과 함께 의회에서 선출한다. 대통령은 국가의 수상이며 행정부를 이끌고 모든 정책을 집행한다. 부통령은 대통령과 함께 선출되며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한다. 의회는 14명의 의원들로 구성된 단원제이며 각 주에서 대표를 선출하고 임기는 2년 혹은 4년이다. 사법부는 헌법에 따라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야프(Yap State), 폰페이(Pohnpei State), 추크(Chuuk State), 코스라에(Kosrae State) 각 주는 자치권을 가지며 주지사와 입법부를 선출한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1979년에 헌법을 채택하였고 1986년 미국과의 자유연합 협정(Compact of Free Association)을 통해 독립 국가로 운영되고 있으며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고있다.
-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경제
미크로네시아의 경제는 주로 관광업, 농업, 어업, 미국의 재정지원에 의존한다. 자원도 없고, 인프라도 낙후되어 경제는 열악하다. 농업은 코코넛, 카사바, 타로, 빵나무 등이며 주로 자급 자족을 목적으로 재배한다. 어업은 광대한 해양 자원으로 인하여 미크로네시아의 경제를 지탱해 준다. 특히 참치 어업은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며, 외국 기업들에게, 어업권을 판매하여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광대한 해양 영토로 인하여 미크로네시아는 관광 산업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통과 인프라가 부족하여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고 있으며 해외 관광객 유치에도 적극적이지 못하다. 다만 다이빙, 해양 스포츠와 관련된 관광객들에게는 좋은 관광지로 알려져있다. 미크로네시아는 미국과의 자유연합 협정을 통해 미국의 경제 지원에 크게 의존하며, 미국의 지원은 교육, 의료, 사회기반 등 다양한 분야에 사용된다. 미크로네시아의 GDP는 2023년 기준, 4억 7천만 달러이며 세계 180~190위권에 속한 작은 경제 규모이다.
- 미크로네시아의 교육
미크로네시아의 교육은 주로 미국의 지원을 통해 운영되며 미국의 교육 제도를 따르고 있다. 교육은 초등 교육, 고등 고육으로 진행되며 초등 교육은 6세부터 8년 동안 읽기, 쓰기, 수학, 과학, 사회 등 기초 교육으로 진행된다. 초등 교육을 마치면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다양한 과목으로 진행되며 대학을 목표로 공부한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에는 국립 미크로네시아 대학(College of Micronesia, FSM)이 있으며 다양한 준학사 학위, 일부 학사 학위로 진행된다. 국립 미크로네시아 대학은 각 주마다 캠퍼스를 두고 있다. 폰페이 캠퍼스(Pohnpei Campus), 추크 캠퍼스(Chuuk Campus), 야프 캠퍼스(Yap Campus), 코스라에 캠퍼스(National Campus), 레코르 캠퍼스(National Campus)가 있으며 이들 학생들은 기초 고등 교육을 받은 후 미국이나 태평양 지역의 다른 대학교로 진학할 기회도 주어진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대학이나 고등학교를 중도에 포기하여 졸업률은 낮은 편이다. 또한 교사와 자원이 부족하여 교육의 질도 높지 않으며 미국의 재정 지원에 크게 의존하기에 재정 지원이 없다면 교육 체계는 크게 타격을 받게 된다.
3.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유적지와 자연 경관
-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유적지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여러 많은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나우루의 무덤은 고대 원주민들의 전통적 매장형 무덤으로서 고대 유물들이 발견되는 곳이다. 고대 돌담(Henge)인 돌로(Dolu)는 파라우 주의 낭기르(Nangir)와 멜레켄(Meleken) 지역에서 발견된다. 푸시퐁드(Ponape) 유적지는 가장 큰 섬인 폰페이(Pohnpei)에 위치하며 특히 난마돌(Nan Madol)은 수백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고대 도시이다. 이곳은 고대 폰페이 왕국의 수도였으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투라수르 섬(Torres Strait Islands)의 유적지는 고대 마을과 거석(Stone Money)으로 유명하며, 이러한 거석은 야프 주(Yap State)에서도 발견되는데 구조와 재질은 석회암으로 만들어 졌으며 지름이 4m를 넘는 거석(Stone Money)들도 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2차 세계 대전의 전투지로도 유명하며 침몰한 군함과 비행기 잔해, 군사 기지 등 전쟁의 유적들이 여러 지역에 남아있다. 특히 추크 섬(Chuuk State)에는 바다속 전쟁의 잔해를 탐험하는 다이빙에게 인기가 있다. 코스라에 주(Kosrae State)에는 미크로네시아의 전통 양식의 건축물들과 원주민들의 전통 생활 방식을 관찰 할 수 있는 관광지이다.
-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자연 경관
태평양의 파도에 숨은 나라,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도 유명하다. 대부분의 섬들은 열대 우림으로 울창하게 덮여있고, 모든 섬들은 아름다운 백사장과 해변으로 이루어져있다. 폰페이, 야프, 추크 코스라에 등 4개의 섬(주)에서도 맑은 바다와 깨끗한 해변을 스노클링, 다이빙, 수영 등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또한 폰페이 섬에 있는 782m의 난구르산(Nan Gur)은 열대 우림과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한다. 미크로네시아의 각 섬의 여러 폭포들은 하이킹의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한다. 대표적인 폭포들로는, 폰페이 섬의 20m 높이의 포흐라림 폭포(Pohrahrim Falls)와 30m 높이의 말레레 폭포(Malem Falls), 20m 높이의 오래이 폭포(Olaai Falls), 코스라에 섬의 15m 높이의 리프 폭포(Lefak Falls), 야프 섬의 18m 높이의 자리기 폭포(Sahl Aifang Falls)가 있다. 미크로네시아 연방 주변의 바다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아름답고 다양한 산호초들이 있다. 특히 두루미 산호(Acropora), 헤르마 산호(Porites), 산호초 양식(Coral reefs) 등과 같은 다양한 산호초들은 스노클링과 다이빙에 인기있는 명소이다. 미크로네시아 정부는 산호초와 관련된 관광 상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함과 동시에 산호초들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도 운영하고 있다.
태평양의 파속에 숨은 나라,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폰페이, 추크, 야프, 코스라에와 같은 4개의 섬(주) 모두 각각의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아름다운 해양 생태계와 열대 우림을 자랑한다. 그러나 경제적 도전과 기후 변화라는 큰 도전을 받고 있으며 특히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은 미크로네시아의 생태계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미크로네시아 연방은 지속 가능한 개발과 동시에 환경 보호를 위하여 지속적이고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며 국제 사회의 협력도 이끌어내어야 한다.